요한복음 14장 1-6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인류의 역사를 어떻게 나누든지 세 가지 질문으로 수렴됩니다. 길의 문제, 진리의 문제, 생명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지나온 삶도 가만 더듬어보면 틀림없이 이 세 가지의 질문이 만들어낸 고민들로 수렴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태어나자마자 선택의 문제이며 진로의 문제입니다, 어느 학교를 가고, 어느 직장을 잡고, 어떤 배우자를 만나, 어느 지역에서 터를 잡고 살아야 하는지 모두 길을 찾는 질문입니다.

진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살면서 만나는 사람과 사건과 물건 중에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를 분별하면서 살았습니다. 시험을 봐도 사지선다형으로 네 개 중에 잘못된 것을 찾으라고 하며, 참과 거짓을 나누는 훈련을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진품에 열광하고 짝퉁에 분노하고, 금반지를 받아도 순금인지 어금니가 아프도록 깨물어 보고 기뻐하는,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삶에 우리는 익숙해져 있습니다. 모두 진리를 찾는 삶의 증거들입니다.

동양의 진시황은 죽지 않고 늙지 않는 불로초를 찾는 방법으로 생명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고, 서양은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인간이 영원히 사는 유토피아, 테크노피아를 이루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불로초를 찾는 것은 진시황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아침마다 비타민을 챙겨 먹고, 아프면 병원에 가고, 비싼 운동기구를 사서 운동을 하고 있다면, 불쑥 나온 배를 보면서 살을 빼고 싶은 마음이 있고, 많은 음식 앞에서 먹을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건강하게 오래 살려는 21세기 진시황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삶이, 길을 선택하는 것, 진리를 선택하는 것, 생명을 선택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진지한 질문과 탐구 앞에 명확한 답을 예수님께 물어야 합니다. 다른 질문을 할 것이 아니라 무엇이 길인지, 진리인지, 생명인지, 죽음 이후의 삶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저는 요한복음 14장 6절을 가지고 이 네 가지 질문, 길, 진리, 생명, 그리고 아버지께로라고 기록된 죽음 이후의 세계인 천국에 대해서 예수님께 질문하고 그 답을 얻어 보려고 합니다. 그에 대한 첫 번째 질문으로 길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 어느 길로 가야 합니까?’

인생은 태어나면서부터 길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인생길이라고 하죠. 찬송가도 있지 않습니까? “인생길 험하고 마음 지쳐 살아갈 용기 없어질 때…” 이처럼 인생을 가장 많이 비유한 것이 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이냐? 어느 길로 가야 할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인기 아이돌 원조 그룹이었던 god가 불렀던 ‘길’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가사가 그 당시 방황하는 청소년들의 마음을 잘 대변해 주는 곡이었고 많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길’ – god

내가 가는 이길 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사람들은 길이 다 정해져 있는지 아니면 자기가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또 걸어가고 있네
자신있게 나의 길이라고 말하고 싶고 그렇게
믿고 돌아보지 않고 후회도 하지 않고 걷고
싶지만 걷고 싶지만 걷고 싶지만 아직도 나는
자신이 없네
나는 왜 이 길에 서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이 노래의 가사가 우리 인생의 길에 대한 질문을 가장 잘 표현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남들이 걸으니 나도 이 길을 걸어야 할 것 같고, 사람들이 선택하니 나도 이 길을 선택해야 할 것 같아서 걸어가지만 가는 내내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맞는지를 고민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길이 궁금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도마입니다. 예수님께로부터 하나님께로 떠나신다는 말씀을 듣고 도마가 이렇게 질문합니다.“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그때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해주신 답변의 말씀이 바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으니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길이다.” 예수님은 ‘내가 길을 잘 안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되면, 진짜 길이 있고, 예수님은 그 길을 잘 안다는 것이 되니 잘못된 것입니다. 그냥 예수님 자체가 천국 가는 영원히 사는 길이신 것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나와 하나님 사이에 놓인 길입니다. 어떤 다른 길이 있는데, 그 길에서 예수님이 길 안내를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길에 올라서서 그 길로 가야 하나님 아버지 계신 천국으로 갈 수 있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b) 여기에는 몇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인간이 길을 잃었다는 것과 그 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언제 길을 잃었을까요?’ 에덴동산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왜, 길을 잃었는가?’ 죄를 지어서 길을 잃었습니다. ‘죄를 지었는데 왜 길을 잃었는가?’ 그때부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죄가 하나님과 인간을 가로막는 높은 담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비극은 아무도 그 담을 무너뜨릴 수 없었고, 그 담을 뛰어넘을 수도 없었고, 그 담을 우회해서 돌아갈 수도 없는 완전히 막힌 담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이사야서 59장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사 59:1-2)

인간이 죄를 짓는 그날부터 인간은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때부터 나름대로 길을 찾으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 했습니다. 인간이 이 담을 넘으려고 한 노력 중 하나는 철학입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왜 인간이 이런 벽에 갇혀 길을 잃어버렸는지 규명하려 했습니다. 인간은 어디서 왔고 왜 존재하며, 어디를 향해 가다가 이 벽을 만났는지를 밝히려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답을 얻지 못하고, 겨우 내가 지금 존재하고 길을 잃었다는 사실만 인식하는 차원에서 머물러 버리고 맙니다.

명상가들은 그 벽 앞에서 벽 너머의 세계에 무엇이 있는지를 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자기들이 몸은 여기에 있지만, 정신은 벽 너머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꿈을 꾸기 시작하고 문득문득 마음속에 그려지는 벽 너머의 세계를 마치 진짜 본 것처럼 현실의 사람들에게 가르칩니다. 그뿐만 아니라 너희도 나와 같이 명상을 하면 벽 너머를 자유자재로 왕래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되면 더 벽은 존재해도 존재하지 않는것과 같고, 네가 벽이 있다는 고정관념만 버리면, 그 벽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고, 언제든지 그 벽 너머를 경험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 벽이 있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기 위해 마음의 수련을 해야 한다고 초월명상, 마음수련, 요가 등을 가르칩니다.

문학과 예술과 미학자들은 어차피 길을 잃은 김에 쉬어간다고, 길 잃은 그 자리에서 의미를 찾으려 합니다. 찾지도 못할 길을 더 이상 찾으려고 하기보다, 그 상태를 즐기기로 합니다. 미술가들은 그 벽에 그림도 그려보고, 예술가들은 그 벽에 장식도 하고 꽃도 꽃아 보고, 문학가들은 그 벽 위에 시도 쓰고 소설도 쓰면서 그 벽을 문학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건축가들은 이 벽을 허물 수 없어 그 벽에 기대어 조각합니다.

계몽주의자들은 아예 그 벽의 존재를 부인하기 시작했습니다. “벽 너머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성의 한계 내에서 인간은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지 초월의 세계나 죽음 이후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에게 종속되어 시녀 노릇을 해온 인간 이성을 신으로부터 분리시켜 독립시키려 했습니다. 벽 너머의 존재와 벽 너머에 있는 신의 세상을 아예 인정하지 않으려는 방식으로 벽의 문제를 넘어서려 했습니다.

과학자들은 그 벽을 만나자, 다른 접근을 합니다. 인간의 모든 기술을 집약시켜 어떤 벽이라도 뚫을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합니다. 혹은 우주선을 만들어 우주에 나아가 그 벽을 뚫어 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벽은 그 어떤 과학적 기술로도 뚫리지 않습니다. 군사학자들은 핵무기를 만들어 그 벽 하나 즈음이라며 시원하게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핵폭탄 수천 개가 터져도 자욱한 먼지가 가라앉고 벽을 보면 흠집 하나 나지 않습니다. 나노기술을 가진 학자들은 머리카락을 수 백 개로 나눈 것보다 작은 카메라를 만들어 그 벽 밑으로 쑤셔 넣어 벽 너머의 세계를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머리카락을 일억 분의 일로 나눈 카메라도 그 벽을 뚫을 수 없습니다. 그 벽은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종교인들은 그 벽 너머에서 건너왔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 벽 너머를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기 시작합니다. 그 벽 너머에서 온 사람의 말을 받아 적어서 그들의 경전을 만들고, 그 사람이 말한 것을 죽을 때까지 지키면 죽을 때 그 벽 너머로 넘어갈 수 있다고 믿고 그 벽 너머에서 온 사람을 숭배합니다. 그런데 벽 너머에서 왔다고 하는 그 사람들이 우리를 벽 너머로 데리고 가야 하는데 나이가 들고 늙으니 우리처럼 모두 죽어버렸습니다. 마호메트, 석가모니, 자칭 예수들이 그러했습니다. 문제는 영원한 삶을 주지 못하고 자신들도 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노력이 무엇이든지 간에 공통점 하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인 그 죄가 만들어 낸 벽을 허물지 못했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지금까지도 길을 잃고 헤매고 있으며, 천국, 아버지 집으로 다시 가는 길을 찾지 못하고 길 잃은 양의 신세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 벽을 뚫을 수도 없고, 돌아갈 수도 없고, 뛰어넘을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방법은 그 벽을 허물어 버리는 권세 있는 분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는 것뿐입니다. 그 일을 하러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인간의 나라로 친히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길 잃은 어린양 같은 인간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친히 그 죄의 담을 허물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 2:14, 18)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막힌 담을 뚫는 방법을 소개하신 것도 아니고, 담을 돌아가는 우회 도로를 인도하는 길 안내자도 아니시고, 담 앞에 지쳐있는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한 위로자로 오신 것도 아니며,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의 담을 허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셨다고 했습니다. 육체로 허셨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혀 있던 우리의 죄를 자기가 죄인인 것처럼 그 모든 죄를 자기의 육체에 다 뒤집어쓰시고, 죽으심으로 죄의 담을 허물어버리셨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0절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옛날 성막 안에는 성소가 있고 하나님이 임하시는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지성소에는 1년에 한 번만 대제사장이 들어가 하나님의 임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의 안으로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모습은 휘장과 같은 죄의 문제에서 자유롭게 왕래하시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휘장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는데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육체가 바로 하나님과 인간을 가로막고 있는 휘장이 되어 그 휘장을 찢어버렸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갈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온몸이 찢어지는 그 장면이 휘장이 찢어지는 장면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찢기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살길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기에,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열린 길입니다. 그 길로 가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 길로 가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께로 갈 수 없습니다. 그 길을 통하지 않고 천국으로 가는 길은 없습니다.

일찍이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목사님이 이런 설교를 수만 명 모여있는 사람들 앞에서 하셨습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있다면, 예수님같이 자비로우신 분이 제일 먼저 다른 길도 우리에게 알려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 외에는 길이 없다고 하셨다면 그 길밖에는 없으므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하시는 예수님이 다른 길이 있다면 왜 가르쳐주셨겠습니까?”

얼마나 맞는 말입니까? 그 길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있다면, 예수님이 제일 먼저 가르쳐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제발 그 길로 가라고 우리에게 부탁하셨을 것입니다. 제발 모두 그 길로 가고, 내가 십자가를 지지 않게 해달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는 예수님은 반드시 그 길을 알려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하나님과 나눈 대화를 생각해 보세요. “아버지, 이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까? 이 방법밖에는 인간이 하나님께로 갈 방법이 없는 것입니까? 아버지여, 만약 저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다른 구원의 길이 있다면, 이 십자가의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여, 이 방법밖에 없다면, 나의 원대로 말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니 하나님께서 “아들아 이것밖에 길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보니, 정말 그 길 밖에는 길이 없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예수님이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을 때는 그 길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주기철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학생이 배우는 길은 학교로 가야 하고, 어부의 고기잡이 길은 바다로 가야하고, 인간의 구원의 길은 십자가의 길로 가야 한다.”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면, 예수님이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마지막에 가서 후회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당장 예수님 길로 오십시오. 이 길 밖에는 길이 없습니다. 어떠한 과학기술과 종교와 철학과 실존으로도 넘을 수 없는 담을 단번에 넘으신 예수님을 우리는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길이 되어주실 뿐 아니라 그 길을 함께 걸어주시기도 하십니다. 단지 함께 걸어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업고 그 길을 만드시며 걸어가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상 확실한 한 가지는 “길 잃어버릴 염려 없네”라는 찬양을 부르며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 길은 옛적부터 믿음의 선배들도 걸었던 길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수천 년 전부터도 미리 그 약속을 받고 그 길을 기뻐하면 걸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레미야 6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렘 6:16a)

여러분에게 이 선한 길이 보이길 원합니다. 선한 길을 일찍부터 알아보고 그 길을 걸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윗입니다. 다윗은 길 되신 예수님을 미리 보고 이렇게 기뻐 노래를 불렀습니다. “다윗이 그를 가리켜 말하기를 ‘나는 늘 내 앞에 계신 주님을 보았다. 나를 흔들리지 않게 하시려고, 주님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마음은 기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체도 소망 속에 살 것이다. 주님께서 내 영혼을 지옥에 버리지 않으시며, 주님의 거룩한 분을 썩지 않게 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생명의 길을 알려 주셨으니, 주님의 앞에서 나에게 기쁨을 가득 채워주실 것이다’” (행 2:25-28, 새번역)

여러분은 어느 길로 걸으실 것입니까? 아직도 길을 찾지 못해 헤매고 계시는가요? 예수님께서 생명까지 걸고 이 길밖에는 없다고 말씀하신 그 길을 애써 외면하고 굳이 다른 길을 찾아 헤매고 계신 것은 아닌가요? 베드로는 예수님께 돌아온 사람들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 왔느니라”(벧전 2:25)

저는 길 잃어버린 분, 지쳐있는 분에게 도전합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이 한 마리 길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시는 장면을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길일뿐만 아니라 길을 만들고 동행하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지쳐서 도저히 걸어갈 힘이 없을 때가 있으실 것입니다. 또는 방황하여 또 길을 잃어버렸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99마리의 양을 두고 길 잃어버린 1마리 양인 내게 다가와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자 일어나 힘내! 내가 길을 안다. 오른쪽, 왼쪽, 더 왼쪽, 직진” 이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찾아오신 예수님은 걸을 힘없는 우리를 냅다 어깨에 업으시고 세상 다 얻은 얼굴을 하시면서 그 길을 친히 걸어가실 것입니다. 그분은 길동무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업고 가시는 길 되신 예수님입니다. 그러한 영원한 목자 되신 예수님을 평생 따라가시길 축원합니다.

최병락 목사. 강남중앙침례교회

작성자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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