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3장 44-52절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중략)…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지금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행동의 제재를 받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놀라운 충격은 우리가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생각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면서도 기쁨이 없다는 사실이다”

사회학자 막스 러너(Max Lerner)의 말입니다. 오늘날 인류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윤택하고 편리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정작 기쁨이라는 위대한 감정은 상실해 버렸습니다. 막스 러너의 말대로 많은 사람들이 기쁨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열된 입시경쟁으로 아이들의 학교생활이 즐겁지 않습니다. 취직난으로 인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불안해합니다. 직장인들은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인해 하루하루가 전쟁터 같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미래사회로 인한 불안감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그런 사회의 모습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기쁨을 찾아 헤맵니다.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행복을 찾기 위해 애를 씁니다. 홀로 여행을 떠나고, 맛있는 음식점을 찾아다니거나 취미생활을 하며 기쁨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열심히 자기 계발을 하고, 미래를 위해 저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한다고 해서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요?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그런 것들은 잠시 마음을 달래줄 뿐 이내 공허한 마음이 찾아오게 됩니다. 스태니슬라우스(Stanislaus Kenedy) 가 쓴 『영혼의 정원』이라는 책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기쁨은 열심히 노력하고 추구하고 갈망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적인 안정감, 지적인 욕구의 충족, 박수와 같이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기쁨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쁨은 하나님의 축복이므로 그것을 찾아 헤맨다 해도 얻을 수 없습니다. 기도하십시오. 기쁨이 올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쁨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자, 기쁨을 누리는 자들

52절을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십니까?

‘스마일마스크증후군’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는 증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의학 용어로 ‘가면 우울증’(Masked depression)이라고도 하는데,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우울한 기분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성도들의 모습이 이와 같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신앙생활을 하고 은혜가 가득한 표정으로 예배를 드리지만, 정작 마음엔 아무런 감동도 없고 기쁨도 느끼지 못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기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실 인생은 어렵고 힘들 때가 많습니다. 고난과 역경의 때를 지나야 할 때가 훨씬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제자들은 상황을 초월한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박해와 무시를 당하고, 있던 곳에서 쫓겨나야 했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기뻐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그들이 누리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기쁨의 조건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행 11:19-21)

스데반이 죽고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을 때 성도들은 몸을 피하여 흩어지게 됩니다. 안디옥에 가서 정착한 성도들은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된 교회가 세워지게 되는데, 바로 안디옥교회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의 가르침 속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한 안디옥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는데, 놀랍게도 안디옥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바나바와 바울이었습니다. 그렇게 1차 전도여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전도여행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구브로 바보에서는 마술사 엘루마가 바울의 기도로 눈이 멀고, 총독 서기오 바울이 예수님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기적이 그들과 함께했습니다.

그러나 기적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심한 박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쫓겨나는 수모도 겪어야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수치와 조롱을 당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 복음을 전하는데 복을 주셔야지, 왜 이렇게 힘든 일을 만나야 합니까?’ 그런 원망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내가 뭐가 아쉬워서 이런 무시를 당하고 조롱을 받으면서 복음을 전하냐?’ 하고 복음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나바와 바울은 그러지 않았고 오히려 기뻐하고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기쁨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만족감에 의해 느끼는 즐겁고 흥겨운 감정’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원하고 바라는 것을 이뤘을 때 만족과 보람을 느끼고, 그로 인해 흥겨움을 누리게 되는데 그것이 기쁨입니다. 바나바와 바울도 복음을 더욱 열심히 전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과 더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길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무시를 당하고 박해를 당하며 쫓겨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뻐했습니다. 인간의 생각과 판단을 뛰어넘는 기쁨, 그 어떤 어려운 환경과 상황도 뛰어넘는 기쁨이 그들에게 임했던 것입니다. 무엇으로 인해 기뻐하는가를 보면 그의 정체성을 알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난과 역경도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행 5:41)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당했습니다. 조롱을 당하고, 욕을 먹고, 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살던 곳에서 쫓겨나기도 했고, 감옥에 갇히거나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위한 고난을 기뻐하는 사람들, 그들이 제자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쁨의 조건은 일이 잘되고, 자녀들이 형통하고, 부요하고 건강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함께 계시느냐, 계시지 않느냐가 기쁨의 조건입니다.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다면 그 어떤 고난과 역경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후 12:10) 바울이 말한 것처럼 오직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아감으로써 세상이 알 수 없는 참된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기쁨의 조건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삶을 기쁨의 조건으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때문에 기쁩니다

참된 기쁨은 돈과 명예를 얻거나 원하는 것을 이룸으로써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들도 기쁨이 될 수는 있지만 영원한 만족을 주진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기쁨만이 영원합니다. 진정한 기쁨을 아는 사람은 가짜 기쁨에 만족하지 않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롬 14:17)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 즉 기쁨이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욕망을 채움으로 얻는 기쁨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의 풍요로움에서 오는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은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하늘에 속한 신령한 기쁨을 추구하며 살 수 있도록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많은 물질을 손에 넣어도, 세상의 높은 명예를 얻어도 그것으로 인한 기쁨이 아닌 주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으로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재정적 어려움이 찾아오고,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만나 눈앞에 캄캄해질 때 주님이 곁에 계심을 믿고 기뻐하실 수 있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흉흉한 바다를 지날 때도 주 예수님은 늘 깨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거친 파도가 몰려와 내 모든 것을 쓸어간다 해도,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소망의 나라가 우리에겐 있습니다. 그것을 기억한다면 얼마든지 기뻐할 수 있습니다.

교회, 기쁨으로 충만케 하라

교회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기쁨이 넘쳤습니다. 사도행전은 그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초대교회에 성도의 수가 급증하게 되어 사도들의 일이 많아졌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때 교회는 일곱 집사를 세워 섬기는 일을 맡게하고,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할 수 있게 하자고 결정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행 6:5-6)

초대교회에도 문제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문제 앞에 넘어지지 않고 오히려 문제를 디딤돌 삼아 더 넓은 지경으로 나아갔습니다. 교회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공동체는 문제 앞에서 넘어지지 않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한 걸음씩 나아가고 기쁨으로 교회를 세워나갑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면 스데반이 순교하고 교회가 박해를 피해 흩어질 때,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 땅으로 가서 그곳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행 8:5-8)

그 결과 사마리아인들이 빌립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구원의 역사가 나타났고, 수많은 기적들이 빌립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사마리아 성에 큰 기쁨이 임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세상에 없는 기쁨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복음을 바르게 전하는 교회가 있는 곳에는 참된 기쁨이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속한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잘 감당한다면, 구원의 기쁨과 회복의 기쁨으로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침례(세례)를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행 16:32-34)

바울이 실라와 함께 2차 전도여행을 할 때 빌립보 지역에서 감옥에 갇힌 적이 있습니다. 점을 치는 여종을 불쌍히 여겨 그녀를 지배하고 있던 귀신을 쫓아내 주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여종의 주인들이 바울을 고소했고, 바울과 실라는 실컷 두들겨 맞고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울과 실라는 감옥 안에서도 찬양했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감옥 안에 울려 퍼지는 바울과 실라의 찬양은 그곳 죄수들을 구원받게 하는 복음의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큰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열렸습니다. 바울과 죄수들을 결박하고 있던 차꼬와 사슬도 풀렸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밤에 자고 있던 간수가 깨어 옥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는 죄수들이 도망간 줄 알고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그 당시 죄수를 잃어버린 간수는 죄수가 받아야 할 벌을 대신 받아야 하는 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때 바울이 모습을 드러내며 말합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바울과 실라, 그리고 죄수들은 도망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두려워하는 간수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바울을 집에 초대하여 가족들도 복음을 듣게 하고 침례를 받게 하여, 온 가족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 큰 기쁨이 임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길 원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국의 소망을 갖고 참된 기쁨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 되길 축복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성령의 사람이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으로 살아가는 복음의 사람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4) 바라던 것이 이뤄졌을 때, 합격했을 때, 사업이 잘될 때, 인간관계가 원만할 때 기뻐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과 역경이 올 때도 그것 때문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믿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10) 바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항상 기뻐하고,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근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고, 가난하여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하며,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기준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부요하심과 평안,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 15:11)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인해 큰 기쁨을 누릴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에만 초점을 맞추고 살 때가 많습니다. 복음의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기뻐합니다. 그래서 늘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참된 기쁨의 근원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쥐어지는 것이 조금 없고 잘 보이지 않는다고 좌절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참된 기쁨은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있다고 기억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이유

우리에게는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약속의 자리로 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살전 5:24) 하나님의 백성들의 결국은 은혜와 축복입니다. 지금은 좁은 길을 걷고, 험난한 삶을 살지 모릅니다. 매를 맞아야 하고 조롱을 당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승리의 자리로 인도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친히 이뤄주실 것입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잠시 넘어질 수는 있어도 완전히 꼬꾸라지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며, 바른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손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 37:24)

누가 우리를 붙들어 줄 수 있습니까? 세상 그 어떤 권력자가 우리를 붙들어준다 해도 그도 결국 사람일 뿐입니다. 언젠가는 분명히 변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변함없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담대하고 기쁘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끝으로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주님께로부터 받을 상급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급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 5:11-12)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핍박과 고난 끝에는 상급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 하십니다. 그 상급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복음의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서 받을 상급에 미련을 두지 마십시오.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상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받는 상급은 주님이 다시 오시면 하나도 남지 않고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받는 상급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상급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늘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고명진 목사

학교법인 예닮학원 이사장
사회복지법인 수원중앙복지재단 이사장
(現) 수원중앙침례교회 담임목사
작성자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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