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장 28-30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얼마 전 휴일에 가족들과 한강공원에 갔습니다. 아이들이 코로나로 너무 답답해해서 정말 맘먹고 나갔어요. 공원에 가서 아이들과 스케이트보드도 타고, 연도 날리고, 또 라면도 먹을 계획이었습니다. 차를 타고 한강공원 주차장에 막 도착을 했죠. 그리고 가져온 스케이트보드랑 돗자리랑 물건을 내리려고 하던 순간, 5살짜리 딸이 저를 도와주고 싶다며, 오빠의 스케이트보드를 저 대신 꺼내주려고 했어요. 딸이 나서서 도와준다고 하니까 저는 그냥 어떻게 하나 지켜봤어요. 땀을 흘리면서 보드를 집겠다고 팔을 쭉 뻗었어요. 겨우 보드가 손에 닿았지만 무거워서 끙끙댔습니다. 결국 보드가 바닥에 ‘꽝’ 떨어졌어요. 저는 딸에게 “아빠가 할게. 여기까지만 해줘도 너무 잘했어. 고마워”라고 말하면서 나머지 짐을 내렸어요. 제 딸이 제 일을 도와준다고 그렇게 노력을 하는 거 보니까 참 고맙고, 예뻤어요. 그런데 딸의 마음은 고마웠는데, 일의 효율은 전혀 없더라고요. 딸을 보면서 ‘에고, 저걸 이렇게 하면 더 쉬운데…, 거길 잡으면 안 되는데…, 내가 하면 더 쉽게 할 수 있을 텐데… ’라고 생각했어요. 솔직히 저는 그 보드를 내릴 때 딸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어요. 그냥 딸이 함께해주는 것 자체가 기뻤던 거예요.

하나님도 우리의 도움에 이렇게 반응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어요. 하나님은 시간을 만드셨고, 중력을 만드셨고, 빛도 만드셨어요. 우리가 볼 때 엄청 어려운 지구의 법칙이나 엄청 어려운 물리학도 하나님은 이해하실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은 그냥 그것들의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움직이시고, 무언가를 만들어 가실 때 따로 에너지가 필요 없으신 분이세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힘과 계획이 필요 없으세요.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보다 우리의 모든 인생의 계획을 더 잘 짜실 수 있고, 우리의 힘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이 이끄는 그런 과정에 개입하는 것을 좋아하세요.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 손에 진짜 책임감을 불어넣어 주시기도 하고, 또 우리 스스로 결정을 내리게도 하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이끄심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을 돕도록 초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사용해주심에 감사할 것밖에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이루시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인간의 문제가 생깁니다. 그 문제는 바로, 가끔 우리가 그 모든 것들을 우리 힘으로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문제가 우리 인생의 문제를 일으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엄청난 짐을 내리실 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이 땅에 살게 하신 것은 우리를 통하여 이루실 목적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물질도 허락하시고, 인간관계도 허락하시고, 또 비전도 허락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건 내 인생이야’하면서 하나님을 잊고 내가 모든 것을 다 이루려고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제 딸이 보드를 땅에 ‘꽝’ 떨어뜨린 것처럼 우리의 인생이 땅에 ‘꽝’ 떨어지는 그런 문제가 생겨요. 언제 그런 일이 생기는 걸까요?

첫 번째로, 사람들의 ‘기대의 짐’을 지려고 할 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수많은 종교 의식들과 행위를 강조했습니다. 그러한 율법과 유전들을 준수해야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말이죠. 종교와 정치, 경제가 일치되어 있던 그 당시 사회에서 이런 종교지도자들의 말은 아주 영향력이 컸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기대와는 달리 이런 종교지도자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율법을 행하기 위해 노력했고, 의식과 규율들을 지키려고 무던히 애를 썼어요. 그러다보니 그러한 것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큰 짐이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 짐을 지는 이유는 우리 부모님의 기대,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기대, 그리고 내가 나를 향한 기대 등에 부응하기 위해서 뭔가 이루어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것들이 짐으로 다가올 때가 있어요. 그래서 괴롭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세상 사람들과 이론은 그럴 때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라”, “무언가를 더 해라”, “네가 이걸 안 해서 그래”, “이것만 하면 돼”. 그런데 그런 것을 시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더 아픈 절망과 고통이 다가오곤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하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라”고 하십니다. 그냥 “오라”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보면 “짐을 내려놓으라”는 말도 없어요. 그냥 “오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짐이 무겁고 힘들 때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나요? 그냥 주님께 오면 되는 것입니다. 딴 거 필요 없습니다. 그냥 주님께 오면 됩니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 오는 것이 그냥 그간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그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순리’를 따르라고. 모든 것이 안 되고 짐처럼 느껴져서 그냥 포기하고 싶을 때, ‘순리’를 따르라고 합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그냥 실패하고 있으면 그대로 내버려 두고, 그냥 포기하고 싶으면 포기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께 가는 것은 이런 ‘순리’가 아니에요. 그리스도인의 순리는 바로 “하나님은 언제나 최선이시고, 최강이시다!”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최선이시고, 최강이신 하나님께 나가는 거예요. 이게 그리스도인의 순리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힘든 짐이 있을 때 그냥 순리를 따른다고 하면서 포기하지 마세요. 그때가 주님께 올 시간입니다. 그때가 바로 주님을 바라보는 타이밍입니다.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에 맡길 때입니다. 주님께 오는 것은 절대 포기하는 시간이 아니라 다시 믿음으로 돌아오는 시간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내가 나의 ‘죄의 짐’을 해결하려고 할 때입니다.

이 본문이 쓰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언가 ‘해서’ 자신들의 죄를 사함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이익을 위한 잘못된 가르침이었어요.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모든 율법을 준수하고 규칙들을 지키는 것들이 정치화되고 종교화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것들로 이익을 얻는 것이 바로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무언가를 계속해서 “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렁게 말하지 않으셨어요. 예수님께서는 그냥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종교적인 행위의 짐에 대해 예수님께서 지금 그걸 다 내려놓고 자기에게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죄의 짐은 우리가 그걸 내려놓기 위해 무언가를 할 때 그것이 더 큰 짐이 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입니다. 그때 저에게 취미가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아빠의 양복 주머니에서 동전을 빼가는 거였어요. 동전 빼가는 재미가 쏠쏠했어요. 저는 솔직히 그게 도둑질이란 걸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어요. 제가 점점 대담해지기 시작한 거예요. 이제는 아빠 양복의 안주머니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겁니다. 아빠 양복의 안주머니에는 ‘지갑’이 있었어요. 그 지갑에서 이제는 동전이 아니라 지폐를 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딱 생각이 드는 거예요. “너무 많이 뺐 다!” 생각해보니까 아빠 지갑에서 돈을 너무 많이 뺀 거예요. 들통날 것 같은 두려움이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걸 해결하려고 묘수를 생각해 냈습니다. 그건 바로! 엄마의 지갑에서 돈을 빼서 아빠 지갑에 넣는 거예요! 와! 어쩜 이렇게 멍청한 생각을 했을까요? 저는 그때 중요한 점을 계산에 넣지 못했습니다. 바로 엄마가 돈에 훨씬 더 민감하다는, 전 우주적인 진실을 말이죠. 그래서 엄마 지갑에서 돈을 뺀 그날, 모든 것이 다 들통났습 니다. 그리고 무시무시하게 맞았던 기억이 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냥 제가 잘못을 깨달았을 때 아빠한테 가서 무릎 꿇고 죄송하다고 용서를 빌면 거기서 문제가 해결되었을 겁니다. 제가 무언가를 해서 그 죄를 덮으려고 했다가 오히려 저의 죄가 더 커지고 징계도 더 커진 거죠.

우리가 절대 해결할 수 없는 짐이 있어요. 내가 해결하려고 했다가는 더 큰 심판을 받는 짐이 있어요. 바로 ‘죄의 짐’이예요. 이 죄의 짐을 해결하기 위해서 다른 종교는 모두 무언가 ‘하라’고 하며 행위를 강조합니다. 이단 사이비들은 말할 것도 없죠. 그러나 이 죄의 짐을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바로 이거예요. “오라.” 우리 죄의 짐을 해결하고 우리의 영원한 삶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 하나의 방법은 바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신 예수님께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죄를 예수님께 가서 고백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예수님이 부르시는 자리가 어딜까요? 바로 예배의 자리입니다. 찬양과 말씀과 기도의 자리로 그냥 가면 됩니다. 여러분, 과거에 여러분이 지은 죄, 여러분이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 그냥 내려놓으면 됩니다. 어떻게 주님께 내려놓을까요? 예배 시간에 여러분의 생각과 의지를 내려놓으세요. 기도할 때 여러분의 모든 염려와 두려움을 내려놓으세요. 그리고 그 과거의 죄가 현재의 나를 억누르고 있는 것을 풀어달라고 부르짖으세요. 그리고 또 뭔가 죄의 짐을 내려놓기 위해 또 하나의 짐을 지려고 하지 말고 그냥 예수님, 그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세요.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이제 제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저를 묶고 있는 과거의 죄들을 모두 용서해주세요.”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한때 큰 행위의 짐을 져서 자신의 죄 사함을 받으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명한 얘기가 있죠. 루터가 친구와 함께 평야를 지나는데 갑자기 벼락이 쳤고, 친구가 벼락을 맞고 숯덩이로 변해 죽어 버렸습니다. 그때 루터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에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죄를 먼저 해결하여 지옥에 안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수도원에 들어갔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여전히 마음속으로 죄를 짓고 있는 불의한 자신의 모습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더 심한 고행을 하기로 결심하고, 깨진 유리 조각들이 깔려 있는 성당의 돌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면서 자신의 육체를 다스려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무릎이 벗겨져 피가 나도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이 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너무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때 루터는 로마서의 말씀을 읽으며 죄 사함을 받는 의로움은 바로 ‘오직 믿음’으로 얻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루터는 행위로 죄 사함을 받으려던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우리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질 수 없는 짐을 우리 스스로 지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짐을 질 수 없다고 느낄 때, 포기하지 마시고 오라고 하신 주님께 나아갑시다. 우리의 죄 때문에 괴로울 때, 그냥 오라고 하신 예수님께로 나아갑시다. 그때 우리에게 진정한 평안이 있을 것입니다.

이승병 목사

침례신학대학교 신학과(B. A.) 및 신학대학원(M. Div.) 졸업
영국 킹스칼리지런던 청소년사역학 석사(M. A. in Youth Ministry) 
주안대학원대학교 선교학 박사(Ph.D. in Intercultural Studies) 
주안대학원대학교, 침례신학대학교, 협성대학교 학부 및 대학원 청소년사역및선교학강의
(現)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청소년사역 외래교수
(現) 한국선교신학회 임원
(現) 세계가나안농군운동본부 청소년 분과 자문위원
(現) 오순절성령연구소 부소장
(現) 정암유스미션 연구소장
(現) 금란교회 비서목사, 선교국장, 청소년부 담당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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