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5장 22-23절, 마태복음 11장 29-30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성령의 여덟 번째 열매인 온유를 생각할 때 우리 안에 금방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유하고, 착하고, 부드러운 모습입니다. 반대 이미지는 금방 화를 내고, 거칠고, 타협할 줄 모르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사람마다 타고난 기질이 있어, 선천적으로 유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성격이 급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가 그렇게 타고난 기질대로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성품일까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도 온유한 성품이 잘 보이지 않는 분들이 있고, 안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온유한 분들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온유를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갈라디아서 5장 23절의 온유를 원어로 보면 ‘Prautes’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유하고 부드러운 온유와는 의미가 좀 다릅니다. ‘Prautes’라는 말은 굴복된 힘을 뜻합니다. 굴복된 힘이란 길들여진 말을 생각하면 도움이 됩니다. 사람의 손에 길들여지기 전의 말은 그냥 야생마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힘을 발휘하며 뛰어다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손에 길들여진 후에는 주인에게 순복하게 됩니다. 여전히 힘도 있고 에너지도 충분합니다. 다만 이제는 주인의 손에 길들여져 주인이 원하는 대로 그 힘을 쓰는 말이 된 것입니다. 이게 온유라는 단어의 원어가 가지고 있는 뜻입니다.

성경을 보면 모세를 가리켜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가리키고 있습니다. 모세는 처음부터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한 모습의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때로 대단한 권위와 카리스마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권위는 늘 하나님께 순복한 권위였습니다. 전에는 자신의 카리스마와 열정을 가지고 히브리인들을 이끌기 위해 나선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성품의 모세를 사용하실 수가 없어 미디안 광야로 인도하셔서 순복의 종으로 만드십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자는 능력과 카리스마와 권세가 넘치는 종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자신의 모든 능력과 경험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종이 필요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시간을 통해 모세를 온유한 사람으로 새롭게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순복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성령의 열매로 온유해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오늘 두 번째로 본 본문의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9-30)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을 온유하고 겸손한 자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온유란 예수님의 성품이고, 우리가 예수님께로부터 배울 수 있는 성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온유를 배우기 위해서는 그의 멍에를 메야 한다고 하십니다. 멍에를 멘다는 것은 순복한다는 뜻이지요. 생각과 의지와 삶을 주님께 온전히 순복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지 않고는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기질적으로 유하고 착하다고 해도 성령님이 우리 안에 이루시고자 하는 온유와는 상관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인 온유는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순복할 때 우리 안에서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코로나19 사태를 지나며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하고 계신 일을 종종 묵상해 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구체적으로 다 알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리셋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그냥 놔두지 않고 새롭고 확실하게 회전시키고 있으십니다. 초기화하시는 것이지요. 그 안에는 세상의 정치, 경제, 생활 방식 등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고, 주님의 교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회복하실 때 어찌 세상 안에 세우신 교회도 회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동안 우리에게 습관처럼 형성된 우리의 신앙생활을 리셋하시고 회전시키고 계십니다.

여러분, ‘회복’이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모습으로 서는 것입니다. 실족한 베드로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실 때 주님은 새로워진 베드로, 성령의 사람 베드로로 다시 세워주셨습니다. 지금 이 상황을 지나가면서 하나님께 회복의 은혜를 구할 때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맙시다.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새롭게 회복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합시다. 주님의 교회가, 주님의 백성들이 이 아픔을 통해 그냥 예전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비극 그 자체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워진 모습, 예수님을 더욱 닮은 모습으로 회복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하나씩 묵상하며 우리 내면이 예수님의 모습으로 더욱 성숙해지는 것을 우리 모두 사모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져보게 되었습니다. 주님께 순복하는 것을 막는 요소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온유란 예수님의 멍에를 메며 예수님께 순복하면서 배워나가는 것인데, 주님께 순복하는 것 자체를 막고 있는 요소가 무엇일까요?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딤후 2:23-25)

이 말씀 안에는 온유라는 단어가 두 번이나 나옵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종에게 주시는 말씀인데, 가르침을 통해 성령님께서 역사하게 하려면 반드시 온유함으로 가르치고 훈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경고를 합니다. 온유함이 없으면 말씀에도 효력이 없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보고 싶은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 순복하지 못하게 함으로 주님의 온유함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께 순복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 – (1) 다툼

딤후 2장의 말씀은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피하여 다투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에게 주신 말씀이지만, 목회자에게만 해당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이 사명을 제대로 지키려면 온유함이 있어야 합니다. 온유함으로 살기 위해서는 다툼을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남겨주신 모범사례를 상고해 보았으면 합니다. 창세기 32장을 보면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으로 겨룬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씨름에서 야곱이 이깁니다. 하나님이 져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십니다. 이스라엘이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그날 밤 하나님과 겨루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형 에서를 보기 전 두려움 가운데 기도를 하다가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한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야곱은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짓는데,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이름을 지은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과 겨루어 싸웠지만 죽지 않게 된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그 누가 하나님과 겨루어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야곱이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날 다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다툰다고 야곱이 변하지 않을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도리어 자신의 온유함으로 야곱을 바꾸신 것입니다.

“또 주께서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시 18:35)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습니다!”라는 말은 주께서 나의 자리로 내려오셔서 인간의 차원에서 나를 이해하시고, 이끄시고, 고쳐주심으로 마침내 나를 높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우리를 크게 만들기 위해 우리와 다투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온유함으로 우리를 만져주시고 일으켜 주십니다. 저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다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과도 다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와 생각이 다르다고, 다른 모습으로 생활한다고, 다르게 옷을 입는다고, 다른 정당에 투표한다고 혐오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살리고 축복하려면 하나님의 온유함을 배워야 합니다. 다투지 않고 혐오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믿는 것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온유함으로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주님께 순복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 – (2) 강압적인 태도

강압적인 태도란 나의 관점을 어떻게 해서든지 권유하고 납득시키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딤후 2:23-25)

깨닫게 하시는 분은 분명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온유함으로 가르치며 하나님이 회개하는 마음을 주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 다시 한번 하나님의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비유에서 하나님을 상징하는 아버지는 어떻게 하시던가요? 먼저 아들이 고집하는 대로 집을 나가게 합니다. 아마 그 일이 있기 전, 아버지는 아들을 설득하고 권유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엔 아들이 원하는 대로 나가게 합니다. 포기해서가 아니라 사랑해서입니다. 자신의 관점을 강압적으로 아들에게 독촉하지 않고, 그에게 온유함과 참음으로 대합니다. 진정한 깨달음과 변화는 강압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떠난 아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렸고, 돌아온 그를 본 순간 달려 나가 그를 맞아주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우둔하고 고집 투성이인 우리를 강압적으로 다루셨다면 다 부러지고 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온유함으로 대해주셔서 마침내 주님께 돌아오게 하십니다.

저 역시 자녀들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너는 목사의 자녀니까 그런 행동은 하면 안 돼!”라고 하며 강압적으로 아이들을 대했습니다. 그러나 남은 것은 아픔뿐이었습니다. 도리어 아이들의 마음속에 회의감을 심어주고 말았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묵상하면서 낮아지는 아버지, 기다리는 아버지, 아파하는 아버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닮아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저와 자녀들의 전환점은 이 깨달음이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자녀 때문에 아파하는 부모가 있을 것입니다. 마음을 움직이고 삶의 진정한 변화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 낮아지고 온유한 부모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 순복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 – (3) 자신의 권리 주장

우리가 마지막 본문의 말씀으로 보았던 구절을 제가 다시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5-8)

우리가 마음에 품고 닮아가야 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말씀을 토대로 설명한다면 한마디로 “자신의 권리를 다 포기하신 분”입니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자기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사람으로 나타나신 후에도 자신을 낮추시는데 결국엔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낮추셨습니다.
여기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함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멍에를 메고 순복하며 배워나가야 하는 모습은 바로 이렇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 내려놓으신 모습입니다. 우리는 나의 권리를 지키는 일에 열심입니다. 그러나 마땅히 내가 주장할 수 있는 권리마저도 사랑하기 위해, 영혼을 살리기 위해, 가정과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내려놓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온유이며 겸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높여 주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눈부시게 높여 주셨습니다. 자신의 온유함으로 우리를 크게 하셨습니다. 각자 주어진 자리, 주어진 위치에서 나의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내려놓을 수 있음으로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사회와 나라를 살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 순복하며 예수님의 온유함으로 살 수 있는 주의 모든 백성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김승욱 목사 할렐루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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