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5장 22-23절, 예레미야애가 3장 22-23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오늘은 일곱 번째 성령의 열매에 대해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성령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의 성품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며 우리의 성품을 성령 안에서 새롭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분주하게 살며, 분주한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해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재택근무 등을 통해 그동안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가정과 우리의 내면을 돌아보는 일을 충실히 할 수 있는 때가 온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성령의 열매를 깊이 묵상하며, 그 열매를 따라 우리 내면이 새롭게 되는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이미 본 성령의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에 이어 오늘은 ‘신실함’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충성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저는 ‘신실함’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우리나라 성경에서 말하는 충성은 영어 ‘Faithfulness’를 문자 그대로 번역한 것인데, 문자적으로는 맞지만 포함하고 있는 뜻은 조금 다릅니다. 충성이라는 단어는 내면의 성품보다는 열정적으로 따르는 행위를 떠오르게 합니다. 백성이 임금을 따라 충성하는 모습이나 군대 문화를 떠올리게 되지 않습니까? 이 또한 충성이지만, 삶과 행동에서 열심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따르고 섬기는 것이 진정한 충성입니다. 지금까지 성령의 모든 열매는 성품 곧 내면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일곱 번째 성령의 열매도 행위보다는 속사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 ‘신실함’이 더 합당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어로 번역된 성경들을 보면 일곱 번째 열매를 ‘신실함’으로 표현하고 있기도 합니다. 신실함은 영어로 ‘Trustworthiness’인데, 이것은 우리가 신뢰하고 믿고 따를 수 있는 성품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가리켜 ‘Faithful’하시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이 단어를 ‘하나님이 충성하신다’라고 번역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성실하시다”라고 표현합니다. 따라서 일곱 번째의 성령의 열매 ‘Faithfulness’란 ‘하나님께서 신실하시고 성실하시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우리가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고 따를 수 있는 분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해서 질문해 봅시다. 나는 과연 신실한 사람입니까? 남들이 우리를 보고, 주변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고 “이분은 신뢰하고 따를 수 있는 분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성품에서 신실함이 보인다면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의 성품이 되기 위해서는 그의 신실하심을 먼저 주목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두 번째 본문을 예레미야애가 3장 22-23절로 정했습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애 2:22-23)

유다가 멸망하고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면서 지은 노래입니다. 슬픔과 절망 중에 지은 노래이기에 애가서라고 부릅니다. 함께 읽은 3장 22-23절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부른 노래지만, 하나님의 신실함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앞 구절까지는 애도하는 내용이었는데, 이 지점부터는 애도가 아닌 희망찬 신앙고백이 이어집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무궁한 인자와 긍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신실한 분이시기에 그는 아침마다 새로운 주의 사랑을 찬양한다고 말합니다. 할렐루야!

지금 유다는 멸망했고,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졌고, 포로로 끌려가고 있는데 무슨 미래가 있었겠습니까? 이렇게 세상이 변한 가운데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 하나가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바벨론에서도 하나님께서는 함께하실 것이고, 언젠가 믿음의 그루터기로 돌아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켜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망을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코로나19로 인해 세상이 완전 변하고 말았지만, 이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는 분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완전히 경험한 자들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독생자를 십자가에 달아 우리를 대신해 죽게 하시기까지 언약에 충실하고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예레미야가 오늘날 우리와 함께 있다면 이 노래를 더 확실하게, 더 담대하게 부를 것입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십자가에서 증명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주목할 때 우리의 눈이 밝아집니다. 눈이 밝아진 사람은 그 자리에 남아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통해 세상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볼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낼 수 있도록 능력을 더해줍니다. 신실하게 사는 자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갑니까? 묵상하는 가운데, 시편 15편을 마음에 품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시 15)

주의 장막에 거하는 자를 소개하고 있는데, 주의 장막이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거하면서 그의 모습을 본받아 세상에서 신뢰를 받고 사는 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오늘 두 가지를 주목하여 말씀드리려 합니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고 사는 자입니다

시편의 저자는 2절에서 주의 장막에 머무는 자가 ‘정직하게 행하며 또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정직과 진실을 생명으로 여기며 살면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습니다. 그의 말과 행동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뢰를 못 받는 사람의 특징은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선 “Man of his word”라는 말이 있습니다.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처럼 자신의 말을 잘 지키는 사람에게 신뢰를 가지고 그를 따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유도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이 그냥 말로 끝났다면, 더 나아가 예수님의 말과 행동이 달랐다면 아무도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런 예수님을 향해 “생명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라고 말했습니다. 생명의 말씀이 주님께 있기에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던 것입니다. 현재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이고 생명이기 때문에 그의 말씀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시 15:4)

“그는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은 약속한 것이 나중에 자신에게 해가 될지라도 지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약한 말을 잘 지키고 있습니까? 결혼식에서 서약한 말, 임직식에서 서약한 말, 사회에서 계약을 맺으며 약속한 것, 다 지키고 계십니까? 언어는 영성입니다. 나중에 해가 되더라도 약속한 것은 지키는 것이 우리의 영성입니다. 이 시편 15편 4절의 말씀이 저의 삶을 인도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할 당시, 저는 공부를 더 할 것인가, 바로 목회를 할 것인가? 두 가지 길 앞에서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미국 북가주 대학촌 마을에서 청빙 요청을 받고 후보자로 선을 보게 되었고, 뜻밖에 담임 목회자로 초청을 받게 되었습니다. 막상 담임목회를 시작하려니 두렵기도 하고, 생각보다 삭막한 시골 지역이라 가지 못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때마침 공부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 주어져 공부를 시작했지만, 마음이 참 무거웠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교회의 소식을 들었는데, 큰 어려움에 빠졌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교회를 위해 금식해야겠다는 감동이 와서, 금식하고 기도하던 중 한 교수님을 찾아뵈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제 이야기를 듣고 시편 15장 4절이 떠오른다며, 처음에 담임목회자로 가겠다고 했었으니 나에게 해가 되더라도 그 약속은 지키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서원했던 것에 책임을 다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오늘날까지 부족한 저를 사용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말에 책임을 지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닮아가는 모습입니다.

후히 베풀며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따라 사는 자들의 공통점은 남을 축복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15편 3절을 보면 우선 그는 남을 헐뜯거나 비방하지 않고 악을 행하지 않고, 5절을 보면 남에게 꾸어주고 이자를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도 자신의 신실하심을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셨습니까? 우리의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부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오늘 말씀 5절에 남에게 꾸어주고 이자를 받지 않는다는 말씀을 좀 더 묵상하면서, 여기에 소개된 자는 하나님의 율법 그 이상을 지킨 사람임을 깨달았습니다.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구약의 율법을 보면 이스라엘 형제들에게 꾸어질 때 후히 주고 이자를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시편 기자는 율법의 문자에만 남아 있지 않고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더 풍요롭게 반영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그의 후한 마음을 보고 배운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도 율법에서 요구하는 것 그 이상, 몇 배로 그동안 남에게 잘못한 것을 갚지 않았습니까? 그 역시 예수님의 후한 마음을 보고 배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후하신 마음, 넘치게 부어주신 은혜를 체험한 자는 바울이었습니다. 한때 주님의 교회를 핍박하며 적대하며 살았던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도로 부름을 받아 우리 또한 그런 은혜를 받은 자로 어떻게 후하게 베풀며 살아야 하는지를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특히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을 통해 어려움에 처해 있는 형제들을 위한 구제와 사역, 헌금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8:9)
후히 베풀며 사는 영성은 나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가난해지셨습니다. 자신의 부요함을 버리고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를 위함이었습니다. 자신이 가난하게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고후 8:14)

예수님의 베푸심으로 우리가 축복을 받았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넉넉함을 통해 지금 부족함 가운데 있는 자들을 보충하고 채우셔서 모두 균등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의 부요함을 통해 먼저 축복받은 자들을 세우시고, 그 후엔 그들을 통해 어려운 자들을 도우려고 하십니다. 지금 누군가를 돕고 있는 우리에게 부족함이 찾아오게 되면, 그때는 우리에게서 도움받았던 자들이 우리를 도와 다시 균등함일 이룰 것입니다.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고후 9:11)

하나님의 은혜로 부족함 없이 넉넉하게 살고 있는 자들이 너그럽게 어려운 자들을 도우면, 그러한 우리의 선한 일을 통해 도움받는 자들은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릴 것이라고 합니다. 도움을 주는 우리의 손길을 통해 저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고후 9:13)

우리가 후히 베풀고 나누고 구제하면, 산 증거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무엇에 증거가 되는 것일까요? 이는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의 복음의 증거를 뜻합니다. 우리의 선한 행실을 통해 세상은 복음을 눈으로 보게 되며, 이는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 저를 통해 영광 받아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방금 읽은 성경 말씀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을 설명해줍니다. 우리가 후히 베풀며 살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 사태로 정말 어려운 때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선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지금 모두 어렵다고 하지만, 비교적 넉넉한 사람도 있습니다. 혹 이때를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은 아닐까요? 최근 여러분들이 내어주신 이웃사랑 헌금으로 어려운 환경에 놓여있는 지체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그분들을 만나 헌금을 전하면서 얼마나 눈물이 났는지 모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웠습니다. 이제는 교회 밖의 어려운 이웃들에게도 전하려 합니다. 또한 성남 지역의 교회들과 연합하여 지역을 도우려 합니다. 함께 힘을 모으니 더 큰 하나님의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일을 통해 그동안 교회를 비난하던 사람들도 교회를 칭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미자립 교회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이 어려움이 미자립 교회에는 몇 배나 큰 타격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외로움 속에 있던 그들이 홀로 서 있는 게 아니라 주님의 교회와 함께 서 있다는 것을 느끼며 낙심하지 않고 일어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정성이 그들에게 전달될 때, 목회자들과 주의 백성들이 받는 위로는 값으로 매길 수 없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보다 어려운 다른 나라들까지도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가 전쟁에 시달린 후 찢어지는 가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세계 여러 나라가 우리를 향해 마음과 지갑을 열어주었고, 세계 교회는 한국 교회를 품고 물심양면으로 도왔습니다. 넉넉한 자들을 통해 부족한 자들을 보충하시고 균등을 이뤄나가시는 하나님은 그때 한국과 한국 교회의 부족함을 세계와 세계 교회를 통해 도와주셨습니다. 덕분에 우리도 이제는 부유한 나라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반면, 전 세계 경제가 위축되고, 산업이 멈춘 이때 빈민국은 더 힘들어졌습니다. 선교사님들도 매우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진짜 선교를 하기 위한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나라들을 위해, 그런 나라들에서 선교하고 계신 분들을 위해 과감하게 베풀어야 하는 시기가 아닐까요?

우리 모두 너무 힘들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오늘날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의 성실하심은 아침마다 새롭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주목하면서 새 힘을 얻읍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증인이 됩시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베푸는 사람으로 변화 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백성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승욱 목사_할렐루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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