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5장 22-23절, 마태복음 25장 35-36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몇 년 전,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 교회 청년 공동체 뉴웨이브에 질문지를 돌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새가족에게는 “교회에 나오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가장 많은 답변 중 하나가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 대답에 매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교회에 좋은 사람, 선한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 대답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착하고 자비로운 분임을 반영한 것이라고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왕이시지만 이 땅에 친히 오셔서 죄인들과 함께 계셨고, 약한 자들을 긍휼히 보시며 도와주셨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사랑이 넘치는 분이셨습니다. 결국엔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 모습을 한 마디로 설명하면 바로 ‘선하심’, 곧 ‘자비하심’이 핵심입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 안에 이루시는 예수님의 다섯 번째 성품은 바로 자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바로 이 예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이 넘치길 원하며, 기대하십니다. 선함과 자비함이 무엇인지 잘 나타내는 말씀이 오늘 우리가 두 번째로 본 마태복음 말씀입니다. 25장 34-3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 25:34-36)

주님께서 우리에게서 찾으실 것이 주님께 베푼 긍휼과 자비의 행동, 즉 ‘착한 행실’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말을 들은 백성들은 어리둥절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마 25:37-39)

그러자 주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 24:40)

여기서 우리가 꼭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모은 자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우리의 구원이 어떤 행실로 인한 게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 2:8-9)

그렇다면 이 말씀에선 왜 구원받은 자들을 착한 행실에 따라 구별하신 걸까요? 그 이유는, 믿음과 착한 행실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구원과 착한 행실은 ‘둘 중에 하나’(Either or)가 아니라, ‘둘 다’(Both and)라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은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뤄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형상 중 하나가 바로 성령의 다섯 번째 열매인 자비인데, 그 자비는 주님의 선한 마음이며 행실입니다. 따라서 믿음과 선한 마음, 착한 행실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당연한 것인지, 본문의 의인들은 자신이 그런 일을 한 것도 기억을 못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의무감을 가지고 억지로 착한 행실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착한 양심을 따라 일상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선행이 실천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선한 성품으로 세상을 축복하고 살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형상을 따라 빚어진 선한 사람입니까? 자비로운 사람입니까? 청년들은 아직도 좋은 사람, 선한 사람이 교회에 있다고 기대하고 있는데, 우리는 과연 선한 사람입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자비와 긍휼이 충만하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진정 그런 성도입니까?

요한복음 8장을 보면, 간음 현장에서 잡혀 온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무리는 여인을 예수님 앞으로 끌고 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모략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유대 종교법대로라면 돌로 쳐서 사형시켜야 마땅한 이들과 자주 어울려 지내시는 예수님이 못마땅해 분노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예수님께 공개적으로 이 여인을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려달라고 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여인을 용서하라고 하면, 유대법을 어기는 자라고 공격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기는 것입니다. 반대로 만일 법대로 돌을 던지라고 하면 예수님이 자신들이 원하는 결정을 내려주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들은 속으로 신이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요 8:7b)

예수님은 유대법을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동시에 여인을 보호하셨습니다. 분명 그중엔 은밀히 간음죄를 범하는 사람도, 마음과 생각으로 간음죄를 범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진행하면 모두가 사형받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법을 존중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법 앞에 온전한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하니, 아무도 던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씩 다 자리를 떠나갔고, 결국엔 여인과 예수님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묻습니다. “너를 정죄하던 사람들이 있는가?” 여인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여인에게 앞으로는 죄짓지 말고 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두 가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비를 베푸시고, 진리를 여인에게 권하십니다. 여기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자비와 은혜를 베푸시고 그 후에 진리로 권면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때나 오늘이나 우리가 쉽게 놓칠 수 있는 부분이 “진리를 강조하면서 자비를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자비를 먼저 보이시고 그 후에 진리로 권면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두 번이나 같은 구약의 한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주신 말씀입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마 12:7)

여기서 제사란 종교적 열심을 가리킵니다. 종교적인 잣대로 세상을 판단하며 사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종교적 제사를 찾는 게 아니라, 자비를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때나 오늘이나 우리에게 종교적인 열심이 부족하다고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에게 자비가 없어서 탄식하며 안타까워하는 분이십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 58:6-7)

자, 그럼 주님의 자비로 충만해지기 위해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바로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빛을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요 9:5-8)

그래서 빛으로 오신 자신의 사명을 선포하신 후, 태어나면서 맹인이었던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강조하시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육안의 시력을 고치신 게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 외에도 시각장애인들이 있었지만, 그들을 모두 고치신 게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진정 강조하기를 원하신 것은 우리의 ‘영적 시력’입니다. 9장 말씀의 배경을 보면, 한 사람의 고침 받은 소식을 듣고 곧바로 수사에 나선 그룹이 있습니다.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그들은 눈을 뜨게 된 맹인과 함께 기뻐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날조차 안식일 제도를 범한 예수를 체포하려는 악심으로만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믿고 따른 맹인은 주님의 빛으로 영적인 눈과 육적인 눈이 뜨였고, 반면 바리새인들은 빛이신 주님을 배척함으로 여전히 어둠 가운데 남아 대조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주님의 빛으로 세상을 보지 못할 때, 우리는 주님의 자비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저는 미국에서 자랄 때 흑인들에게 상처받은 일이 있어 그들을 향한 감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그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L.A에서 폭동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4·29폭동입니다. 이 사건은 인종차별에 격분한 흑인들이 일으킨 유혈사태였습니다. 당시 저는 그 일을 마귀가 가져온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임을 선포하며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그때 한 흑인 형제가 다가와 저를 꼭 안아주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한 형제임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믿어지고, 주님의 빛이 제 속에 임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흑인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주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베스트셀러 저자이자 미국 풀러신학교의 리처드 포스터(Richard Foster) 교수님의 저서 『기도』에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스승이 제자들에게 “얘들아, 너희는 어두운 밤이 지나고 새벽 동이 튼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니?”라고 물었습니다. 학생들은 각기 대답했습니다. “네 저기 보이는 나무가 참나무인지 세쿼이아 나무인지 구별할 수 있으면 새벽 동이 튼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저기 지나가는 작은 동물이 족제비인지 여우인지 구별할 수 있으면 동이 튼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러자 스승이 대답합니다. “진정 어두운 밤이 지나고 새벽 동이 트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내 옆에 있는 자가 바로 내 형제인 것을 자각할 수 있는 때란다. 그가 나의 형제인 것을 구별할 수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어두움 속에 남아 있는 것이란다.”

여러분, 우리는 깊은 어두움 속에서 나와야 합니다. 주님의 빛을 받아 그 빛으로 세상을 비출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자비로 세상을 보며 예수님의 선한 마음으로 사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김승욱 목사 할렐루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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