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8장 11-15절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우리네 부모님께 가장 많이 듣던 말이 뭔가요? 표현은 다양했겠지만, 결과적으로 “착하게 살아야한다”는 말 아닌가요? 이런 말과 가르침들의 반복에 대해 사람들은 다양한 형태로 반응하고 성장하지요. 어떤 분은 상대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 말 끝나기도 전에 “네. 그렇습니다! 좋습니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주지 않기 위해서 싫은 소리를 못하고, 때로는 자기가 더 윤리적이지 못했다는 것에 자책하기도 합니다. 부모님의 가르침 이전에, 사람은 기본적으로 인과응보라는 개념이 마음 한가운데 자리한 존재들입니다. 종교가 없어도 소위 양심을 저버린 사람들이 아니라면, 어느 새인가 사람의 심성 한가운데 자리 잡는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교회에서 이런 말 많이 듣어 보셨나요? “교회라서 참는다.”, “교회니까 그냥 넘어가는 거지.” 어떤 분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회봉사에 열심히 참여하는 친구가 있어, 이 친구만 끼면 파토가 나고, 컨트롤이 안 되고, 자기감정을 너무 쉽게 표출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면서 사실 속마음은 시원하게 쏘아붙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어느 교회에나 그런 사람은 있지만 교회는 또 그런 친구들을 품어주어야 한다는 신앙적 당위성도 있습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그런 사람에게 싫은 소리를 하려면, 사실 어느 정도 관계가 있어야 하는데, 교회에서의 관계라는 게 따지고 보면 서로 그렇게 친하지도 않습니다. 계속 그런 친구를 받아주자니 그렇고, 또 정작 문제는 그것을 문제 삼을 정도로 착하지 않은 나는, 반대로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는 착한 사람입니다. 이 딜레마를 어찌할까요? 또 신기한 것은 참아 주는 게 힘들다고 하는 그 사람도 누군가가 참아주거든요. 심지어 알고 보면 서로 참아준다고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자체검열이든, 교회의 분위기 때문이든 착한 성품을 지향합니다. 본래보다 더 착해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착한 성품과 신앙을 산술적인 정비례 관계로 조망하기도 합니다. 특히 우리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람의 인격을 신앙과 직결시켜서 해석하기도 하지요. 참 피곤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일명 ‘착한 사람 콤플렉스’ 가운데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어떻게 ‘착하게 살자!’라는 문신이라도 해야 하나요?

본문은 4~8절에 등장한 그 유명한 ‘씨 뿌리는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입니다.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한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지요. 그런데 씨가 떨어진 곳이 제각각 다릅니다. 너무나도 익숙하듯 ‘씨 뿌리는 자’는 하나님. ‘씨’는 일종의 말씀, 혹은 복음이라는 메세지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밭, 혹은 땅’은 각 사람이지요. 4종류가 있습니다. ‘길 가, 돌짝 밭, 가시떨기, 그리고 좋은 땅’입니다. 그리고 떨어진 땅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내지만, 결국 ‘좋은 땅’ 이외의 곳에 떨어진 씨앗은 과정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결실하지 못합니다. 결실을 이룬 좋은 땅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개의 땅은 하나님 나라 복음이 우리 안에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되는 이유의 대표로서 등장하지요.

5절에 “새들이 쪼아 먹기도 하였다”에서 ‘새’는 12절에서 언급하듯 ‘악마’를 상징합니다. 영적존재인 악마의 열심은 실존하는 강력한 능력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할 때나, 말씀을 들을 때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6절의 “돌짝 밭에 떨어지니 물기가 없어서 말라 버렸다”는 말씀의 신앙은 일명 ‘중고등부 신앙, 수련회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운운하기 이전에 과연 하나님이 누구시고, 성경이 뭐라 하는지 모릅니다. 모르다 보니 그것을 진득하니 내 심령에 녹여내는 실존적 과정이 상실됩니다. 감정적이거나 감동에 머무르는 일종의 휘발성 신앙에 머무르는 것은 위험합니다. 마음이 힘들면 다 날아갑니다. 공식 장애물인 군대에 가고, 취직하고, 결혼하면 다 날아가 버리지요. 다른 복음서의 표현대로라면 “뿌리를 내리지 못하니” 같은 얘기이지요. 뿌리가 없으니 수분을 공급받을 수 없어 이내 죽어버립니다.

이어서 7절의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라는 말씀은 14절 표현대로라면 “근심과 재물과 인생의 향락에 사로잡혀”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욕구는 정상적이나 그것이 과다해져서 욕망으로 발산된다면 거기에 취해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이는 신앙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중요한 가치들, 관계나 삶의 목적에 대해 방향을 상실하게 합니다. 그런데 정작 인간을 가치롭고, 의미 있게 하는 것들은 보다 더 긴 호흡을 필요로 하고, 여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반면 무엇이든 즉각적으로 우리에게 쾌락을 선사하는 것들. 즉 특별한 노력과 과정이 없어도 쾌락이 주어지는 것들은, 무의미하지는 않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을 망치는 것들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결실은 궁극의 ‘샬롬인’데, 당연히 단기간에 열매가 양산되지 않습니다. 그리 값싸지도 않습니다. 우리 영혼의 가치가 그렇게 싸구려가 아니잖아요. 때문에 복음의 씨앗이 뿌리를 내려 자라나 열매를 맺는 기간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나 그 열매를 보기도 전에, 단발성의 쾌락들이 그곳으로 발길을 향하게 합니다. 재미있는 게 너무 많습니다. 특히 뭐 돈 문제는 걸렸다 하면 홈런이에요. 또한 무서운 것은 ‘중독’이지요. 그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중독’수준에 이른 것입니다. 자기는 즐긴다고 생각하지만, 즐기는 대상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이처럼 말초적인 쾌락을 주는 도구들을 무조건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도 잘 놀 필요가 있어요. 그런 소소한 즐거움을 잘 누리실 필요가 있어요. 교회가 너무 팍팍하고 재미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하루하루를 즐기는 즐거움, 과연 그것들의 총합이 나를 더 가치 있고 의미 있게 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이 살아있으니까 그냥 사는 건가요? 오늘만 사는 인생인가요? 우리가 즐기는 그 어떤 쾌락의 극한도 하나님나라가 선사하는 기쁨의 만분의 일의 수준에도 이르지 못합니다. 우리는 살아있으니 사는 게 아니라 의미와 목적이 있는 존재이고, 오늘만이 아니라 영원을 살아갈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핵심이자 정말 제시하고 싶었던 것은 세 가지 결실하지 못한 땅이 아니라, 사실 ‘좋은 땅’입니다. 그렇다면 결실을 맺는 ‘좋은 땅’이란 무엇인가요? 네. 뭐라 하든, 우리의 얄팍한 첫인상은 어느새 이‘좋은 땅’이라는 표현을 토질이 좋은 땅이라 연상하게 되고, 자연스레 선하고 착한 사람을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그건 종교적으로 길들여진 인간이지 복음적인 인간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 믿을 때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거룩하게 인도해 가신다는 ‘성화’라는 것은 그의 모난 성품을 깎아내고 성장시킵니다. 그렇지만 그의 기질과 성향을 무시하면서까지 모두 ‘착함’이라는 일종의 Q마크 찍힌 공산품을 요청하지 않습니다. ‘좋은 땅’의 의미에 대해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15절 말씀을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이 본문의 베이스가 된, 마가복음 4장 본문을 소환해보면 좋을듯합니다. 마가복음 4장 20절은 “좋은 땅에 뿌려지는 것들이란 이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서”라고 말씀합니다. 이방인들을 위해 기록된 누가복음의 표현이 보다 더 장황하고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 핵심어는 두 가지입니다. ‘좋은 땅’이란, ’듣다’와 ‘받아들이다’입니다. 다만 ‘듣되’ 긍정적인 마음으로 들을 것, 그리고 ‘받아들이되’ 그 의미를 조금 더 무겁고 진중하게 ‘굳게 간직하고 견디다’라고 풀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그냥 기계적 수용이 아니라, 하나님나라가 그를 믿는 자녀들에게 임한다는 그 하나님의 약속을, 전혀 하나님나라가 없는 것 같은 세상, 안 올 것 같은 이 현실 속에서도 끝까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에게 너무 즐겁고 괜찮은 것이 많음에도 거기에 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기쁨이 충만함에 대한 기대를 간직하는 것, 즉 그것이 좋은 땅이자, 그것이 믿음임을 드러냅니다. 네. 결국 좋은 땅의 토질은 전혀 중요치 않습니다. 오직, ‘말씀을 듣고 받는 땅’이 중요합니다.

좀 더 부연설명을 해보면 우리가 깨닫기 쉽게, 8장부터 예수님의 미묘한 변화가 감지됩니다. 이전까지는 예수께서는 싸움 걸어오는 바리새인들과는 논쟁하고 쓴 소리를 하셨지만, 일반 대중들을 향해서는 늘 열려있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8절에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고 하시면서 9-10절에 지금까지 좀처럼 보지 못했던 싫은 소리. 매몰찬 모습이 대두됩니다.

그 전에 다시 한 번 우리의 이해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길들여진 종교적 군상, 혹은 타고난 품성을 지닌 소위 착한 사람을 만나 주시는 게 아닙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일방적인 휴머니스트이기에 무조건 약자 편을 들어주시는 것도 아니에요. 그분이 원하셨던 것은 ‘듣는 사람’입니다. 다만 착하지 않은 녀석들, 이미 종교적 죄를 가득 지어놓아 가능성을 상실한 죄인들, 그리고 사회적으로 암 것도 없는 약자들이 예수에 대해 더 열려있었기에 더 많이, 더 잘 반응할 수 있었던 것뿐입니다. 그런데 기존의 바리새인들을 위시한 권력자나 소위 종교적 착함에 있었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미 칭찬받고 존중받는 그 잣대를 포기할 수 없었기에 그 자리에 있어도 듣지 않았었거든요. 그런데 귀는 폼으로 달고 있고,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기 위해 오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이 가르침이 시작된 배경을 보세요.

4절에 보면 “무리가 많이 모여들고, 각 고을에서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오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너무 유명해지셨어요. 이제는 찾아가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아서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냥 오나요? 그 전에 예수님을 만났던 이들은 예수께 그 어떤 기대감을 투영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제는 각자 저마다의 기대와 예수에 대한 해석과 계산을 안고 찾아옵니다. 먹으려고, 치료받으려고, 왕 삼으려고. 평가하려고 등 어찌 보면 이런 거지요. 농토인데, 자기 멋대로 용도변경해서 건물을 세워버립니다. 여기는 아예 씨를 못 뿌려요. 듣는다는 것은 자기만의 기대와 해석을 투영시키지 않고 말씀 하시는 바 그대로, 즉 제자의 자리로서 그 말씀을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는 겁니다. 아니면, 듣는 자가 아닙니다. 당연히 ‘받아들인다’, ‘굳게 간직할 사람’이라는 말은 이러한 진정성과 수용성과 연동되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뭐냐고요? 지금까지 무엇을 다루었습니까? ‘좋은 땅’의 개념에 대해 재조정해보았습니다. 결국 우리의 자세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매번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은 나의 자세가 무의미하지는 않아도, 결국 하나님의 일하심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핵심은 의외로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이 비유의 배경인, 당시 팔레스틴 지방의 농사법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네 농사법은 먼저 땅을 잘 경작해놓고 씨를 심지요. ‘선경작, 후뿌림’입니다. 하지만 그 때 그곳은 ‘선뿌림, 후경작’이라고 합니다. 씨를 밭에 뿌리고 난 후 쟁기 등으로 갈아엎는 것이지요. 무슨 말입니까? 결국 씨가 뿌려진 땅은 거기에 뭐가 있든 농부가 다 갈아 엎어버릴 땅입니다. 즉 농부 입장에서 좋은 땅이란 농부의 쟁기질을 순순히 받아들여 갈아엎어지는 땅입니다. 그렇다면 그 땅의 토질이 아무리 어떠했더라도 씨에서 싹이 나고 성장해 결국엔 열매를 맺습니다. 물론 토질이 달라 어디는 30알을 내놓을 수도, 60알을 내놓을 수도, 100알을 내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그것을 탓하지 않습니다. 단지 쟁기질을 받아들였냐 아니냐를 탓하겠지요. 좋은 땅이란, 그저 농부이신 하나님이 쟁기질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수용하는 땅입니다.

하나님 기준으로 그 어떤 인생이 좋은 땅이겠습니까?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내가 저 인간 보며 참는다고 오만 생색 다 내는데, 누군가는 그런 나를 참아주고 있다니까요? 다 거기서 거기일 뿐이지요.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희생하지 않으면 구원할 수 없는 땅들이에요. 내 인생을 위해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 불가능한 임무)을 찍고 계신 겁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와 그 열심을 고작 수용하고, 찬양하고, 불편해도 인도당하는 것이 우리의 최선입니다. 어쩌면, 좋은 땅을 부정하는 데서, 좋은 땅을 내가 만들어낼 수 없다는 데서, 그리고 좋은 땅을 찾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을 내려놓는 데서부터 우리의 귀가 열리고 마음이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역시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자, 그저 주님을 따라야할 사람일 뿐임을 자각해야합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의 기대를 투영하는 ‘무리’가 아니라, 비밀을 가르쳐주신 ‘제자’로서 우리 주인님의 말씀을 진짜 들읍시다! 그러면 하나님의 쟁기질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말씀의 씨앗, 즉 하나님나라 복음은 역동성이 있기에,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자체에 생명력이 있기에 어떻게든 자라납니다. 정말로 우리가 제자로서 그의 말씀을 들었다면, 당연한 수순이에요. 하지만 고민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있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이지요. 내 삶에 어떻게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적용할 수 있을까 하는 치열한 물음들이 올라옵니다. 그리고 ‘더 배우고 싶다, 더 알고 싶다’는 열망이 자라나게 되지요. 네. 단지 거기에 반응하시면 돼요. 그런데 “나 할 일이 많잖아?”라며, “뭐가 이리 복잡한가?”하며 귀에서 말씀을 떨어버리고, 자족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난 여기까지야. 여기까지만 해야 해. 이것만 해도 내 할 일을 한 거야.”

신앙이 자라지 않는 것은 우선 듣고 받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 말씀 자체에 내재된 생명력을, 그리고 자라나 열매에까지 이르려는 그 역동성을, 자신이 막기 때문입니다. 8장 이전에 사람들은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을 겁니다. 주님의 사랑은 그 어떤 죄책도 넘어섭니다. 다만, 오늘 예수님께서도 단호하게 말씀하셨듯이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죄는, 어찌 보면 말씀이 뿌려졌는데도 숙고하지 않고, 어물쩡 넘기거나, 자기 기대를 투영하여 전혀 다른 식으로 해석해서 수용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그 어떤 기대도 없이 귀에 튕겨 내버리는 것이 바로 가장 큰 죄이고, 스스로 죄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을 허락해 주셨다”라는 10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어떤 은혜 안에 머물고 깨닫는다면, 나의 재능과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일하심이기에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일부러 진실을 감추어, 일부러 비밀을 만든 것은 아닙니다. 가짜 눈과 가짜 귀를 달고 있는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처럼 보이지 않는 눈과 들리지 않는 귀로 보고 듣는다면, 어느새 공공연한 사실도 비밀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어 재미난 장면이 등장합니다. 예수께서는 단호하게 얘기하십니다. 19~21절에서 “듣고 행하는 자들이 나의 가족이다”라는 말씀은 앞의 가르침과 연동된 구절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나라의 가족이란 그저 교회당에 나아와 함께 예배드리는 사람들,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고 친한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고, 정말 받아들였기에 행하는 사람들이 교회의 공동체를 이루어갑니다.

생명력을 스스로 먹어버리는 소비자가 되지 마시고, 생산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소비하려고 오신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우리가 정말 그 말씀을 듣고 받아드린다면, 자족이 아니라, 더디더라도 하나님 나라를 더 열망하고, 하나님을 더 욕망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어렵지요. 호시탐탐노리는 악마의 존재, 비인격적이거나 종교적으로만 접근하려는 우리네 성향, 또한 쾌락과 욕망들로 인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진정 한 영혼에게서 꽃이 피면 엄청난 결실들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생명력이 생명력과 이어졌기에 그러합니다. 아무 의미도 없을 것 같은 한 사람에게서 수많은 생명들이 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샬롬’을 누리겠지요. 쉬운 것부터 합시다. 습관을 들여 봅시다. 말씀 다시듣기를 꼭 생활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무의미하게 소비하는 신앙을 넘어서, 그 나라가 정말 우리에게 현실에서도 생생하게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초적 쾌락을 넘는 기쁨이, 현재의 즐거움을 넘는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여러분에게 주어지길 바랍니다

손성찬 목사

총신대학교 신학과(B. A.) 및 신학대학원(M. Div.) 졸업
백석대학교 기독교전문대학원 조직신학(Th. M.) 수료
팟캐스트 공동 진행
육군 군종목사
예향교회 유초등부 전도사
람원교회 청년부 담당목사
(現) 이음숲교회 담임목사

■ 저서
『묻다, 믿다,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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