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5장 27-32절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잇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중략)…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지난주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요. 방송과 관련해서 제 중·고등학교 때 사진 좀 보내 달라고 요청받았어요. 학창 시절의 저는 사진 찍히는 걸 극도로 싫어해서, 사진이 없을 거라고 대답했지만, 그래도 부탁하셔서 오랜만에 앨범을 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거의 없더군요. 문득 내가 그때 정말 자존감이 없었던 녀석이었다는 생각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외모뿐만 아니라, 옷차림, 능력 등. 그러니 사진을 기피했지요. 그러다가 우연히 초등학교 때 상장들을 발견했어요. 6년 개근에 걸 맞는 개근상, 품행우수상, 성적상 등. 그런데 눈이 가는 상장이 있더군요. ‘글짓기 상’. 그것도 세 개나 있었습니다. 분명 예전에도 본적이 있는 상장들일 텐데, 이번에는 좀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제게 글쓰기의 능력도 재주도 관심도 없는 사람인줄 철썩 같이 믿고 있었고, 지금도 그런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보니. ‘내가 재능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제게 “너 참 글 잘쓰는 구나, 더 써보렴!” 하며 칭찬해준 사람이 없었기에, 그렇게 망각했던 것입니다. 반대로, 오히려 ‘나는 글쓰기 싫어해. 재능 없어, 귀찮아’라는 생각에 머물렀고, 그게 십수 년 간 제 안에서 반복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니, 결국 객관적인 사실과는 별개로 저는 저 스스로를 ‘글쓰기 못하는 사람’으로 규정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바라볼 때도 이런 우를 범하는데, 전혀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타인을 바라볼 때는 어찌될까요?

본문은 예수께서 ‘시몬’이라 불리는 바리새인에게 초대를 받아 식탁에서 교제하는 장면에서 벌어진 일을 그리고 있습니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열려있는 연회 같은 자리였어요. 익히 아시겠지만, 예수님과 대립하던 바리새인들 중 하나가 예수님을 초대했다는 사실에 그 숨은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제 막 랍비로서 걸음마를 시작한 그를 자신들 입맛대로 구술리거나, 만약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술수를 부리는 것이지요. 전형적인 정치논법인데, 메시지를 공격할 수 없다면, 메신저를 흠집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모든 말이 거짓이라고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 방법이지요.

그래서 시몬은 재미있는 짓을 합니다. 본래 이처럼 초대하여 모신 손님에게는 지켜야할 전통예법이 있습니다. 환영의 입맞춤을 선사하고, 손과 발을 씻을 물을 내오며, 그 이후에 바를 수 있는 올리브유를 내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44~46절을 통해 알 수 있듯 아무것도 예수께 베풀지 않습니다. 서열 매기기인지, 예수를 자극하여 실수를 유발하려고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이지요. 그런데 예고에 없던 엄청난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 연회의 주인도 아닌 한낱 여인이, 심지어 ‘죄인’이라 불리어 그 자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여인이 갑자기 예수께 그 삼종 세트의 환대를 합니다. 추측하건대 사람들에게 ‘죄인’이라 불렸던 그녀는 신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무가치한 인생이자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치부하였을 텐데,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메시지를 전달받고 아마 이 자리까지 나오기 전, 이미 나름의 회심과 감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설교자들뿐만 아니라, 성경을 좀 읽었다 하시는 분들은 이 여인이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곳에 사람들을 헤치고 예수 앞에 나아왔다고 설명하며 극적으로 몰고 가지만, 애매한 지점이 있습니다. 45절에 보면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즉, 그녀가 예수께서 오시기 전부터 있었는지, 예수께서 거기 있으신 다음에 군중사이로 나아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죄인인 여인이 시몬이 해야 할 환대를 행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게 엄청난 도화선이 됩니다. 왜냐하면 44절을 보면 전혀 관계없는 외간 남자의 발에 입 맞추는 신체적 접촉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머리카락을 감추는 관습이 있었는데, 여자가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냈다는 점은 지금 우리가 봐도 야릇할 수 있어요. 당대 문화적 관점으로는 상상도 못할 망측한 일이거든요. 더 문제는 예수께서 그 모든 것을 수용하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셨지만,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엄청난 도발이었습니다.

예견된 일은 아니었으나, 잘 걸렸다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몬이 말합니다. 39절을 보면 우선 4장에서 예수께서는 본인을 선지자 엘리야 빗대며 자신이 예언자라고 밝히셨는데, 예언자는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자 아닙니까? 그런데 그 죄인인 여자의 정체를 간파하지 못했기에, 그는 예언자가 아니라고 부정합니다. 또한 여인이 만지는 것을 가만둔 고로 그는 의인이 아닙니다. 심지어 그냥 여인이 아니라 죄인인 여인이기에, 죄인과 어울린 예수 역시 죄인이라고 단정합니다. 짧은 평이지만, 예수를 골로 보내버리려는 고도의 계산된 평가 선언이었지요. 이 우발적 사태가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예수께서는 짐짓 그가 환대하지 않았음을 짚으신 후, 도리어 더 나가. 여자와 말을 섞지 않는 관례를 깨시고 선언하십니다. 48절에 보면 “네 죄가 용서받았다” 심지어 50절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도대체 뭐가 이렇게 파격의 연속이고, 예수님께서 무엇을 전달하시고 싶으신 걸까요?

무언가의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 ‘~이다’로 설명하는 방법과, ‘~이 아니다’로 설명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의인은 이런 식으로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다.”라는 설명과 함께 그 대표자로 바리새인이 소개됐지요. 반면에 의인이 아닌 죄인, 즉 절대 의인이 될 수 없는 이들로 소개되는 세 명의 대장이 있습니다. ‘세리, 군인, 그리고 창기인 매춘부’입니다. 유대인들이 죄인들, 악인들을 말할 때 관용 어구처럼 늘 묶여서 쓰던 말이었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는 ‘레위라는 세리’가 나옵니다. 그런데 제자가 됩니다. 7장 전반부에는 군인. 그것도 원수라 불리는 로마 군인들의 장인 ‘백부장’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이만한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는 게 백부장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셨습니다.

이제 마지막 ‘창기’가 남았네요. 그런데 ‘창기’는 앞의 두 부류랑 좀 다릅니다. 세리는 돈이라도 많았지요. 군인은 권력이라도 강했지요. 그런데 매춘부는요? 지금은 ‘성 노동자’라고 표현해달라고 할 정도로 뭔가 기준이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의 매춘부는 대부분이 사회구조와 경제적 문제로 인해 발생했었습니다. 특히나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그 중에서도 본문의 배경인 갈릴리지방은 유사 이래 최고의 경제적 수탈과 압박가운데 있었거든요. 남자들마저 일용직 노동자나 수탈 아래 있는 소작농이 대부분이었으니, 여성의 팔자야 훤하지요. 게다가 머리카락만 내놓아도 쯧쯧 거리는 세태 속에 매춘부의 삶을 선택한다는 것은 제 정신 박히고 할 짓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생존문제가 컸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결과만 보고 판단합니다. 모든 인간에겐 정신 승리를 위해, 어떤 희생양이 필요합니다. 희생양을 물고, 뜯고, 씹어서 ‘그래도 내가 쟤보다는 낫지’라는 심리적 안정감이 필요한 겁니다. 때문에 ‘창기’라 불리는 이들은 이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더 강력하게 비난받았습니다.

그러나 보다 근원적인 질문이 있어요. 정말 이 여인은 매춘부였을까요? 여러분 제가 이 여인을 매춘부라고 전할 때 의심한 사람 있어요? 저 뿐만 아니라, 설교자들과 많은 주석 책들도 그녀를 매춘부라고 단정 짓고 설명합니다. 물론 정말 그랬을 가능성이 농후해요. 하지만 확실치 않습니다. 정말 창기였다면, 다른 곳에서처럼 ‘창기’라고 소개했겠지만, 본문은 ‘죄인’이라고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45절에서 설명하며 말씀드렸듯이 만약 그녀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면, 현직 매춘부였을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바리새인의 연회에 그런 사람이 처음부터 있을 수는 없거든요. 제 생각엔, 아마도 현직이 아니라, 과거에 그러한 행적이 있었던 여인이 아닐까 싶지만, 그것도 추측이지 정확히 모릅니다. 본문 가지고는 절대 확인불가입니다.

비슷한 경우가 등장해요. 바로 뒤 8장 2절에서 “일곱 귀신이 떨어져 나간 막달라라고 하는 마리아” 그녀 역시 매춘부 출신으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으십니다. 그런데 그건 거짓말이에요. 그것은 591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의 설교 때문입니다. 그가 7장의 ‘죄인인 여인’과 ‘막달라 마리아’가 동일한 여인이라고 해석했고, 이 ‘죄인인 한 여자’의 죄를 음행으로 해석했습니다. 반면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일곱 귀신이 떨어져나갔다는 것은 일곱 가지 큰 죄를 지은 것인데, 그 중에 가장 큰 죄가 창녀로서 음행한 죄라고 해석했지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라고 규정지었습니다. 분명 오독이에요. 우선 성서학자들이 밝혀냈듯이 이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렇게 실제는 초대교회 위대한 여성 지도자이자 부활의 첫 증인이었던 막달라 마리아가, 졸지에 창녀로 해석되어 1400년 동안 오명을 뒤집어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1969년 로마 교황청은 이를 공식적으로 철회합니다. 하지만 한번 인이 박힌 인상은 계속 됩니다. 가톨릭뿐 아니라, 개신교까지 그 맥락이 이어져 지금도 막달라 마리아를 몸 파는 여인이었다고 각색하여 전해지는 설교나 컨텐츠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는 지금 사실관계 오류에 대해 따지고 싶은 게 아닙니다. 그녀가 매춘부였든, 아니었든 예수께서 그녀의 죄를 용서하시고,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까요. 다만 어쩌다 그 ‘죄인인 한 여인’이 우리에게 아무 의심 없이 ‘창기’라고 받아들여지게 되었는가를 주목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이 박힌 이미지는, 훗날 그 어떤 변화가 있어도, 여전히 한번 인이 박힌 이미지로 평가하는 우리네 습성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곱씹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그 어떤 비판적 사고 없이, 권위자들, 전문가들의 말, 그리고 사회적 시선에 의해 선과 악을 너무 쉽게 판단합니다. 아니 사실, 판단할 능력이 우리에게 없지요. 그러면 겸손하고, 유보라도 해야 하는데, 되게 피곤해하면서 쉽게 결정합니다. 물건은 비교하고 꼼꼼하게 체크하고 구매하면서, 사람은 왜 그럴까요?

결과적으로 죄인이지만, 과정은 심난합니다. 시몬과 같은 당대의 권위자들이 그녀를 ‘죄인’이라 규정하였고, 이에 따라 마을 사람들도 다 그렇게 보고 있었습니다. 입소문이 돌아, 어떤 행적들은 부풀려졌을 것이고, 부풀림이 부풀림을 낳았습니다. 그때만 그런가요? 얘기했듯이 일부의 책들을 빼고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마저 무비판적으로 그냥 그 여인이 ‘매춘부’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아요. 아니 고작 자기 마음만 한 바퀴를 돌아도 천하의 못된 놈이 됩니다. 우리는 묵상을 하면서 처음엔 ‘저 인간 참!’하다가, 더 묵상하면 ‘나쁜 놈’, 한 번 더 묵상하면 ‘개놈’, 한 번 더 묵상하면 어느새 ‘마귀새끼’가 되어버립니다. 자기 마음 안에서도 이러는데, 사람들 입과 귀를 몇 번만 거치면 그 누구도 악마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한 인생과 마주하지 않고, 대화 한번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우리는 그렇게 너무 쉽게 판단해버립니다. 이처럼 수많은 ‘죄인’들을 양산해내는 죄인 양산업자들이 우리이지요. 사실 이런 게 죄 아닌가요?

그런데 한 가지 더 주목하고 싶은 사안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막달라 마리아나, 이 여인을 너무 쉽게 매춘부라고 단정하는데, 왜 사람들은 의심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어찌 이리 쉽게 부풀려질 수 있었을까요?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게 쉽게 폄하되는 사람들의 특징은 그 사회의 약자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때로는 죄진 게 없어도, 그 허름한 행색이나, 출신, 외모를 보고 죄인으로 규정하기도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나, 그 여인이 왜 그렇게 폄하되었을까요? 그것은 여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여성인권이 대두되지만, 그 당시는 처참했습니다. 이러한 그 시대의 약자들은 항변할 수 있는 자리에 힘도 없고, 굳이 대변해줄 사람도 없기 때문에 더 쉽게 ‘죄인’으로 판단 받고, 회복도 안 되었습니다.

특별히 누가복음은 이런 약자들을 끊임없이 소개합니다. 그래서 여성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성뿐만 아니라, 가진 게 없어 손에 흙만 묻히고, 피를 묻히고, 영혼마저 파는 인생들 이야기가 많이 소개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약자만을 위한 종교인가요? 아닙니다. 본문 36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그 모의를 아셨지만, 시몬의 초청에 응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볼까요? 예수를 무너뜨리려는 협잡꾼이자 위선자들의 식사. 즉 죄인들의 식사초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는 똑같은 자리였어요. 그래서 응하셨습니다. 심지어 그 모욕 앞이라도 자리를 파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48절을 보면 “둘이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라고 말씀하시는데 주님 보실 때는 다 빚진 자들이고 죄인들입니다. 약자의 하나님이나 강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죄인들의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누구이든지 은혜를 수용하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때문에 죄가 얼마나 크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냐가 중요합니다. 어떤 죄인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합니다. 이게 부정할 수 없는 기독교의 진리이자, 이것을 믿는 곳에 구원이 있습니다.

때문에 예수께서는 선포하십니다. 50절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무슨 믿음입니까? 우리 주님은 거래 이전에 긍휼히 여겨주시는 분. 심판 이전에 죄를 사해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진정 은혜의 하나님이시다’라는 확고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어떤 믿음입니까? 사람들의 시선을 넘어 바리새인의 집으로, 사람들의 판단을 넘어 예수께 환대를 베푸는 믿음입니다. 사람들에게 투영된 메시야는 이래야 한다는 상식을 넘어, 예수가 바로 그 주님임을 고백합니다. 마치 백부장의 그것과 비슷하지요. 그 믿음 앞에 예수께서도 사회적 시선을 넘어 그녀의 환대를 받아들이셨고, 사람들이 ‘죄인’이라 판단한 것을 무시하고, 그녀를 ‘죄인’이 아닌 한 사람으로 받아주시고, 심지어 ’의인’으로 칭하여주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러한 믿음이길 바랍니다. 거기에 주님의 일하심이, 구원이 있습니다.

여러분. 빚진 자를 불쌍히 여겨 사해주시는 주님을 온전히 믿길 원합니다. 그처럼 은혜를 아는 자가 됩시다. 나아가 내 마음속의 죄인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기 바랍니다. 상대방에게 우리는 ‘죄인’, ‘나쁜 놈’이라는 말을 내뱉기가 얼마나 쉬운가요? 그런데 그가 정말 죄인이 맞나요? 어쩔 수 없는 인간적 연약함이 있더라도, 예수의 뒤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다르게 나아가야 합니다. 판단 이전에 ‘어쩌다 저렇게 되었는가?’를 살필 수 있는 연민과 통찰력이 있어야 합니다. 심판보다는 긍휼의 시각이 필요합니다. 주님 앞에 그도, 나도 ‘갚을 길이 없는 자’들일 뿐입니다. 판단은, 심판은 나중에 해도 됩니다. 아니, 주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옆 사람을 바라봅시다. 누가 앉아있습니까? ‘죄인’인 우리가 교회를 죄인들의 모임이라고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서로를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의 과감한 행동을 마주합니다. 분명 다른 곳에서 예수께 나아갈 수도 있었을 겁니다. 연회 후에 사람들의 시선과 격리될 수 있는 곳이나 마을과 마을 사이 말입니다. 그러나 굳이 이 날선 상황에서 자기신앙을 고백한 것은, 본래부터 거기서 고백하기로 계획한 자리였거나, 그 어떤 순교자적 강렬한 신앙적 동기를 가졌다고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도 그리 당하며 살기에 아픔이 아픔을 알아봅니다. 그 자리에서 소외당하고 외면당하는 예수님의 그 아픔에 대해 공감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 각자에게 다 자기만의 아픔이 있어요. 그렇다면 자신과 비슷한 결의 아픔을 가진 이들의 아픔을 더 잘 이해할 것입니다. 품어줍시다! 환대합시다! 그리고 주님을 전합시다!

손성찬 목사 이음숲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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