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7장 1-10절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중략)…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손꼽을 만큼의 대전환의 사건은, 313년 콘스탄티누스대제에 의해 발효된 ‘밀라노 칙령’입니다. 아시다시피 초대 기독교는 사회를 미혹케 하는 이단종교라 불리며 가장 최전선에서 탄압받았지요. 그러나 이 선언으로 한순간에 정반대로 로마제국에서 가장 선망하고 추종하는 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실제로는 모든 종교에 관용을 베푸는 선언이었으나,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그 역시 기독교 신앙에 대해 굉장히 호의적이었기에 파급력이 대단했지요. 황제가 우호적으로 여기는 종교에 그 밑에 정치 권력자들은 아무 딜레마 없이 수용합니다. 그게 로마제국 안의 유행이 되고 후로는 일종의 문화가 됐지요. 핍박과 박해 가운데, 신앙적 순수성을 지켜왔던 마이너리티의 기독교가, 이제는 신앙적 결단과 별개로도 받아들일 수 있는 주류의 종교가 됩니다. 명과 암이 있지만, 그 이전과 이후의 기독교가 전혀 다른 면모를 보입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신앙에 대한 논란이 큽니다. 박해로부터 해방시킨 장본인이고, 로마제국 내의 패권을 얻기 위해 명운이 건 전투에서, 주님의 계시와 같은 십자가를 보았고, 이것을 깃발문양에 새기고 출전함으로 승리했다는 기적적 이유도 병행하며, 그의 신앙을 치켜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통치내용이 전혀 신앙적이지 않았다는 이유, 게다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임종 직전에서야 세례 받았다는 사실이 걸림돌이 됩니다.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서로마 멸망 후, 소위 말하는 야만족들 중심으로 국가들이 생성될 때, 가장 강력하게 주변국들을 복속시키며 프랑크 왕국을 세웠던 클로비스라는 왕. 이때 클로비스가 다른 세력과 손잡거나 다른 신앙을 기반으로 했다면, 또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가 기독교신앙을 믿기로 하나, 세례 받을 때 재미있는 행동을 합니다. 그와 그를 따르는 최고의 부하들이 오른손을 머리 위에 올리고 침례를 받습니다. 즉, 다른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겠지만, 칼을 잡는 오른손은 물에 잠기지 않음으로 전쟁만큼은 계속하겠다는 의사 표시였던 것이지요. 처음 이 사례를 들었을 때 비웃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은 반대로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그들은 믿는다는 것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믿음을 고백하며 세례를 받는 행위는, ‘나는 죽고 주님만 존재한다. 새로운 정체성으로 살아간다’로 바뀌어야 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적인 순종이 상실된 우리가 비웃을 만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누가복음 6장에선 평지설교를 살펴보았습니다. 결국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을 결코 포기치 않으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이해, 동의, 수용이 믿음의 시발점이자 내용임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라, 마지막에 믿음의 또 다른 양상을 언급하시면서 마무리 하셨습니다. 6장 46절을 보면 결국 사람은 믿는 대로 행한다고 제가 자주 말씀드렸지만 이 말도 사실 불완전합니다. 사람은 어떠한 사실을 수용해서 믿는다고 하는 것과, 정말 그 믿음대로 사는 것이 실제는 불연속적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윤리 시간에 배워서 우리가 아는 것과 윤리적으로 사는 것이 다르지요. ‘사람을 돕는 게 선한 것이다’라고 동의하고 이를 수용하나, 막상 그 순간의 선택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내가 믿고 있다고 해서 그 순간에 기계적으로 그 선한 선택이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살다 보면, “나는 당연히 그런 선택을 할 거야”라고 강력하게 말했던 사람들이, 정작 그 순간에 도망가는 꼴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그 때의 동의와 고백이 무의미하거나 거짓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고 봅니다. 수용하고 동의하는 것만을 ‘믿음’이라고 하기에 사람의 심리가 단순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믿음의 더 깊은 양상, 즉 ‘실존적 믿음’이라는 것에 대해 돌아봐야 합니다. 일종의 믿음의 도약이 필요한 지점이랄까요? 그리고 이 실존적 믿음을 대변하는 말이 바로 ‘주님’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주인님’의 축약어라는 무미건조한 사전적 의미 말고요. 본문의 ‘백부장’의 사건은 바로 이 말의 심층적 의미를 그 어떤 본문보다 잘 그려내기에 이 자리에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9절에 보면 심지어 예수께서 도대체 무슨 차별성이 있길래, 그 수많은 믿음이 좋다는 유대인들, 예수님의 제자들, 심지어 세례요한도 제치고, 이 사람의 믿음이 최고라고 선언하실까요?

지난주에 나누었던 폭탄과도 같았던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원수를 사랑하기는커녕 오히려 피해의식에 젖어 수많은 원수들을 자체적으로 양산해냈습니다. ‘원수’란 지극히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개념으로 실체가 없습니다. 반면 유대인들에게 공통적으로 원수라 칭해지는 로마군인, 4-5절을 보면 그 압제자들 중의 지휘관인 실제 백부장이란 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 원수였어요. 그런데 6장 29-30절은 일반적인 로마 군인들의 행태에 대해 그들이 원수임에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를 지시하는 자가 백부장입니다. 한 마을의 치안과 통관을 담당하면서, 온갖 불의와 불법, 뇌물과 강포함으로 피지배민들을 억압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원수가 오히려 그들을 사랑합니다. 이런 면에서 이스라엘에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습니다.

둘째는 7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과 대조가 됩니다. 그들의 시공간은 제한되었고,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 그곳에서 성전중심 신앙으로 똘똘 뭉쳐 그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에, 그곳만을 추종했습니다. 안식일이라는 일종의 거룩한 시간에 대한 추종도 있었고요. 그러나 오히려 백부장은 주가 여기 계시지 않아도, 그 만남의 순간이 아니더라도 말씀만 하시면 다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즉 예수께, 그리고 예수를 통해 발현되는 하나님의 능력에 시와 공간의 제한이 없음을 믿었습니다.

이어서 셋째는 이러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그가 이루시는 기적을 직접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방식, 방법, 해석대로 오시지 않는 자가 메시야일리 없다는 확신 때문이지요. 백부장과 예수님은 직접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보지 않고도 그는 사람들에게 들은 바를 토대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특정 짓고, 예수님을 진정 신뢰했습니다. 꼭 보고 체험해야 믿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누군가를 통해 전달된 메시지일지라도, 성경이라도, 이를 내가 원하는 바대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바, 성경이 전하는 바를 그대로 믿는 자에게 놀라운 능력이 일어나고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에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주님’의 뜻이 오롯이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아주 심플해요. 7~8절에 보면 “주인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온다”는 백부장의 말이기에 더 무게감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천명을 지휘하는 천부장부터는 귀족 가운데서 임명됩니다. 하지만 백부장은 평민출신으로 말단 병사부터 시작하여 로마 전역을 순회하며 최소 15년을 복무한 사람 중에 로마로부터, 그리고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우는 병사들로부터 대내외적으로 인정받은 이가 세워지는 자리입니다. 평생을 그들의 장군, 더 나아가 그 위의 로마황제의 명에 복종하며, 목숨을 걸어서라도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는 바를 가장 충실하게 실행했기에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주인에 대한 복종의 표상인 것이지요.

물론 그는 프로그래밍 된 대로 움직이는 기계가 아닙니다. 때문에 전투에 임하기 전 계산이 왜 안서겠어요.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분에 대한 자각은 그것을 넘어서지요. 그렇다면 이렇게 주님으로 고백한 백부장의 삶의 궤적도 추적할 수 있습니다. 로마황제 통치, 즉 로마제국의 안녕과 보존, 그리고 그 통치의 확장을 위해 목숨 걸고 존명하며 최전선에서 싸우던 사람이잖아요. 이는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안녕과 보존,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의 확장을 위해 살아가는 것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사명을 가장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입니다.

나아가, 백부장의 주님은 더 깊은 울림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그가 로마제국의 ‘백부장’이기 때문입니다. 로마 황제만을 주님으로 섬기며 절대충성을 바치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고작 대놓고 고혈을 빨아도 되는 무가치한 피지배민들, 그들의 신이 버려서 망했다고 여겨지는 망한 나라의 한 종교인일 뿐인 예수라는 자를 ‘주님’으로 칭하다니요. 단지 가오를 넘어, 로마를 섬기고, 로마황제를 섬기는 이 백부장의 ‘주님’ 발언은 정치적으로 악용되어 목이 달아날 수 있을 만큼 위험한 발언이었습니다. 입에서만 맴도는 고백, 습관이나 신에 대한 경배의 고백이 아닌, 그 ‘주님’은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너버린 그 무게를 가늠하기 어려운 고백입니다. 엄청난 반전이자, 엄청난 도약을 이룬 ‘주님’이에요. 이보다 더 진실할 수 없어요. 이스라엘에 이만한 믿음이 없습니다. 그의 믿음은 ’주님’의 의미를 실존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모델로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내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는, 아직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평하시며, 일을 벌이십니다. 10절을 보면 정말 그가 믿는 대로 이루어집니다. 그가 믿는 대로 주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민족과 혈통을 초월하여 치유하셨고, 그가 믿는 대로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도 사람들의 정보에 의지하여 사람을 보낸 그를 믿어주시고, 치유하셨어요. 예수께서는 이스라엘과 달리 원수라는 개념을 무너뜨리시고 초월하셔서 그의 종을 치유하셨어요. 아니, 그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원수인 백부장의 믿음을 수용하시고 칭찬하시므로, 백부장의 종만이 아니라 백부장을 구원하셨습니다.

이러한 흐름이 그 다음 11-17절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예수께서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십니다. 과부는 그 자체로 가장 불쌍한데, 심지어 아들이 죽은 과부라면 삶의 소망이 전무하여, 이미 죽은 자나 다름없는 가장 불쌍한 자의 표상이에요. 그러나 주님은 살리십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의 긍휼함을, 그리고 죽은 자마저 살리시는 능력이 있다는 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이 그 다음 11-17절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예수께서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십니다. 과부는 그 자체로 가장 불쌍한데, 심지어 아들이 죽은 과부라면 삶의 소망이 전무하여, 이미 죽은 자나 다름없는 가장 불쌍한 자의 표상이에요. 그러나 주님은 살리십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의 긍휼함을, 그리고 죽은 자마저 살리시는 능력이 있다는 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죽은 자보다 더 허망하고 후패한 우리네 믿음에 대한 일갈이지요. 그러나 동시에 늘 살리시는 예수의 사랑에 반응하고 순종한다면 아무리 죽은 자라도, 누구나 다 포기하고 가망 없는 자일지라도 살아나고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명명백백하게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는 어디에 갑니까? 내가 아닌 존재가 되어야 합니까?”라고 따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정 자비로우신 분이고, 그의 절대적 능력에 대해 의심치 않는다면 우리는 불편한 게 아니라, 오히려 전 재산을 팔아 보석이 묻힌 밭을 산 사람처럼, 그것이 가장 합리적인 삶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누가 강제하지 않아도, 누구 눈치 볼 필요 없이 우리는 그렇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오해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나의 것을 뺏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더 나답게, 무엇으로부터도 구속당하지 않는 나로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모든 것이 당신의 것입니다.”라는데 이르지 못하고, 우리가 여전히 사적영역을 남겨둔다면 어떨까요? 결국 그 사적 영역, 즉 내 재산, 관계, 에너지, 시간 등이 나중에 주도권 논쟁으로 발현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주간에는 하나님이 오너인 사업장의 정직원이라 먹고사는데 전혀 지장 없을 만큼 급여나 복지가 좋은데도 더 벌고 싶어서 회사 몰래, 밤에는 자기사업을 하면서 균형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가당키나 합니까? 인간이 어디에 더 신경 쓸까요? 당연히 내 일이지. 그렇게 밤에 내 일하고, 낮에 가서 좁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조퇴할까?’ 아니면 ‘어떻게 몰래 근무시간에 내 일할까?’ 고민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사업을 이용해 먹다가, 때가되면 내가 원래는 사장이었다며 뛰쳐나갑니다.

여러분, 인생이 잘 나갈 때는 믿음이 관계없습니다. 부족한 믿음일지라도, 잘 버티고 서 있거든요. 그런데 인생의 고난이 찾아올 때, 그 믿음은 나부끼는 겨처럼 흩날립니다. 내 믿음이 내 인생을 담지 할 줄 알았는데, 아니, 정작 고통과 고난이 찾아올 때, 내 믿음이 내 인생에 아무 의미가 없음을 자각합니다.

49절을 보면 심지어 그 집의 무너짐이 엄청납니다. 왜냐하면 밉거든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은 알겠는데, 나에게 왜 이런 고난이?’라며 분노하게 됩니다. 까놓고 말해 “내가 지금까지 참았는데, 절제했는데, 봉사했는데, 왜 투자한 만큼 안 줘? 저런 놈도 잘살게 해주시면서. 하나님이 없나? 무능력한가? 악한 분인가?”라고 하면서 그냥 무너지는 게 아니라 그 집의 무너짐이 엄청나 회복이 안 될 정도입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집을 세우지 않았었더라면”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왕창 무너지는 거에요. 그러나 백부장의 그것과 같이, 이미 그 도약을 이룬 자의 ‘주님’, 내적 결단까지 이른 사람의 믿음은 다릅니다. 48절 말씀처럼 피곤하나, 넘어지지 않습니다.

누구나 인생을 살다보면 필연적으로 고통의 문제 앞에 어느새 놓여 있게 됩니다. 지금 이 시간 자기신앙 전반을 돌아봅시다. 어디에서 넘겨짚어 배운 것을 토대로 믿지 마세요. 부모나, 내가 선망하던 신앙의 선배가 그려놓은 그림을 토대로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대로 죽을 때 그 앞에 서서 고민해보겠다는 콘스탄티누스나, 이 영역은 포기 못하겠다는 클로비스의 사례처럼 오만하지도 맙시다. ‘하나님’이라는 말은 신앙 없는 이도 부를 수 있는 그냥 기독교의 ‘신’을 나타내는 고유명사입니다. 그러나 ‘원수’가 지극히 주관적인 말인 것처럼, ‘주님’ 역시 지극히 주관적이고 관계적 용어가 아니라 그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 되길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그분으로 인한 절대적 치유와 자유함과 구원 가운데 있길 소원합니다.

손성찬 목사 이음숲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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