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6장 35-36절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누가복음 5-6장에서 예수님은 유대교적 율법해석을 뒤집어 엎어버리시는 가르침들을 쏟아내셨어요. 구원과 직결되는 ‘죄인’과 ‘의인’의 개념을 엎어버렸고, 유대인들이 의인이 되기 위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안식일’ 개념을 엎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사람들이 무수히 많이 몰려들었고, 열심히 치유하시던 주님께서는 그 대중들을 향해 설교를 시작하세요. 20~49절까지의 내용으로, 이를 일명 ‘평지설교’라고 합니다. 이를 요약하자면, 예수님에 의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바라보는 시각이 재조정되었는데, ‘도대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실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사실 이 ‘평지설교’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이라고 불리는 세 장에 걸친 내용의 요약본이라, 구체적인 내용은 마태복음 강해할 때 다루는 게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태복음이 실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알리는 것에 포인트가 있다면, 여기 평지설교는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대?’를 알리는 데에 주목적이 있습니다. 이방인들의 복음서잖아요. 이방인들에게 전통적인 율법은 원래 큰 의미가 없습니다.

평지설교는 앞서 언급했던 의인과 죄인에 대한 개념들을 다시 압축적으로 정리한 후 시작합니다. 20~26절이 바로 그 내용이지요. 그런데 이 정리된 내용을 또 다시 정리한 문장이 있습니다. 5~6장에서 단 한 문장으로 요약되는 구절이 다음과 같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 6:20)

두 가지 의미에서 엄청난 선언입니다. 먼저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당시는 ‘뭔가 죄 된 이유가 있어서 하나님께 벌 받아 저런거다’라는 생각이 사람들에게 편만했거든요. 반대로 불의한 방법이 아니라면, 일반적으로 부자는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때려 부순 겁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전통적 의미의 ‘하나님 나라’는 다름 아니라 이스라엘, 즉 유대인들을 위한, 유대교신앙을 기준으로 한 국가의 회복이었어요. 그리고 그 나라는 지금껏 식민지배에 타협하지 않고, 심지어 끝내 율법을 지켜낸 소위 말하는 바리새인 같은 모범적 ‘의인’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수여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모든 기준을 뒤엎고, 하늘나라가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라 하십니다.

이런 논조는 계속됩니다. 21절 말씀에서 우리는 소망을 느낍니다. 특히 몇몇은 지금 굶주려 늘 배고픈 이들에게 천국이 있습니다. 2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핍박받는 자들. 가장 복 없어 보이는 이들에게 복이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이해하기 쉽게 현재의 버전으로 제가 패러디했던 구절이 있습니다.

‘놀아 볼만큼 놀아본 자는 복이 있나니, 저들의 허무함이 채워질 것이요. 살아보려 부정을 저지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정의롭다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더 벌어보려 피곤에 찌든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안식을 누릴 것임이요.’

이런 자들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문득문득 자기 병세가 확인되고,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을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이 필요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의 나라’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주어지고, 살기에 복이 있다는 게 예수님의 천지개벽 같은 전환입니다. 27절부터는 드디어 이런 재해석된 개념으로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설명해주십니다. 이 역시 율법아래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당시에 대중적이었던 유대교적 대답들. 즉 돈은 얼마를 꾸어줄 수 있고, 이자는 어떻게 되며, 안식일에 노동이란 어디까지 가능하며, 어떻게 지켜야하며, 누구까지가 구원 가능한 인생이고, 어떤 인생은 불가한지, 어떤 직업은 괜찮고 안 되는지 뭐 이런 가르침들마저 예수님께서는 재해석하셨습니다. 왜 계속 예수께서는 이처럼 딴 지 거는 작업들을 하셨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인간은 늘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해버리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습니다(41-42절). 인생의 진리이지요. ‘내가하면 로맨스, 남이하면 불륜’이라는 생각에서 사람은 정말 못 벗어납니다. 우리는 타고난 자기중심적 자기합리화의 달인들이지요. 본능적으로 나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하고. 이런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런 비틀어진 시각을 갖고, 네가 선과 악을 따지고, 의인과 죄인을 가르는 게 가능하냐? 정당하냐?’는 것을 예수님은 꾸짖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과 대척점에 있는 바리새인들이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을 것이고, 모두가 그러진 않았을 겁니다. 늘 우리는 그게 얼마나 선한 것이든 상관없이 결국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자신이나 자신의 집단을 변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할 뿐, 순수하게 그 선함을 이어나가지 못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일갈을 날리세요. “위선자야!” 우리는 타고난 위선자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결국 뭘 알려줘도, 지 멋대로 해석해내지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27-36절을 보면 처음부터 뼈를 때립니다. 27절의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구절은 너무 유명한데, 사실 말도 안 됩니다. 이것 때문에 자기신앙을 비하하는 사람도 많고, 이 말도 안 되는 계명 때문에 예수를 4대성인 반열에 올려놓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목해보세요. 원수라는 게 실체가 있나요? 우리가 가장 나쁜 놈이라고 흔히 떠올리는 ‘살인자’와 비교해봅시다. ‘살인자’는 누구에게나 나쁜 놈이지만, 사실 나하고 큰 관계만 없다면 관심 없습니다. 그러나 ‘원수’는 누군가에겐 좋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만큼은 세상 가장 나쁜 놈이지요. 살인자는 실체가 있는 것이지만, 원수는 내 감정이 증폭되어 만들어낸 상상 속의 존재이지, 실재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살인자는 객관적인 표현이지만, 원수란 ‘나’라는 존재를 기준으로 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단어입니다.

때문에 이 말씀은 ‘원수’같은 극악무도한 자를 사랑해야만 네 신앙이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새디스트 같은 율법, 혹은 누구도 달성할 수 없을 것 같은 이상향의 법을 제공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닙니다. ‘원수’라는 말을 통해, 언제나 세상의 중심에 자기를 놓고, 바깥을 바라보려는 우리네 그 세계관을 깨부수는 원 펀치(One-punch)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깨지면 다른 이에 대해 절대 사랑할 수 없는 존재라는 개념은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나지요. 가장 나쁜 놈이라 불리는 살인자도, 세리도, 로마군인 마저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내가, 혹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내가 이렇게 살아야만 한다!”라는 가르침을 부여했어요. 예수님은 우선 늘 자기중심적으로 자기합리화나 하는 위선적인 ‘나’라는 존재는 그렇게 의지적으로 살 능력이 일절 없음을 폭로하고, 도리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35절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라는 대답에서 찾습니다. 하나님은 어떤분이세요?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다.” 인자하신 분이지요. 어떤 사람들에게요? ‘악한 사람들’은 간단히 누구나 인정하는 나쁜 짓을 한 죄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이건 단순히 염치없는 인간이라는 뜻을 넘어섭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세요? 유대인들이 그리 추종하는 구약성경에도, 하나님은 그들의 끝도 없는 배반에도, 끊임없는 사랑을 보여주신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은혜라는 말의 뜻처럼, 조건 없는 일방적인 선을 베푸시는 분이지요.

그런데 이런 은혜를 받은 자들이, 지금 자기들이 만들어낸 조건으로 남들을 두드려 패잖아요. 이게 ‘은혜를 모르는 사람’의 정체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하나님은 인자하시답니다. 그러니까 그게 누구든, 모든 인간에게 인자하세요. 네. 하나님 입장에서는 크기의 차이일 뿐, 다 타노스 놀이에 빠져있는, 그래서 결국 다 응징 당해야 하는 놈들이에요. 그러나 집나갔던 그 탕자를 늘 서성대며 기다리던 그 인자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는 누구나 은혜 가운데 머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인자하시다는 사실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36절에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요? 각자 다른 삶의 모든 상황에 대해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줄 비법 따위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자비로우셔서 나를 받아주셨다는 진실이 나를 압도할 때, 우리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아무도 보는 이 없는 때에라도 늘상 ‘자비로운 사람’으로 나를 자리매김하려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보상의 원리’에 근거해서, 먼저 받으면 베풀거나, 내가 받을 것들을 기대하며 주지만,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은 남에게 일방적으로 먼저 베풉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의 행실들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물론 아무리 자비로운 하나님을 믿더라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 즉 ‘은혜’를 베푸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선 가진 게 있어야 주지. 다 개털이야.” 물론 이 역시 자기 합리화입니다. 가만히 보면 힘든 사람들이 더 잘 돕고, 맨날 앓는 소리 하는 인간이, 더 여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은혜’를 베풀어보세요. 줘놓고 안 바란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많이 주면, 준만큼 돌려주길 원하는 것을 넘어, 그 인생을 좌지우지하고 싶어집니다.

게다가 이차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대상이 바로 그 자비로운 하나님이 맞더라도, 그분과 나 사이가 위선적 관계, 혹은 우리에게 가장 안정감 주는 비지니스 관계로 연결되어 있으면, 즉 믿음의 진실성이 없는 죽은 관계라면 말짱 도루묵이잖아요. 46절은 ‘주님’이라는 단어로 함축되지요. ‘주인님’이라고 하며, 우리가 그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실제 그 마음에는 주인님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고, 더 나아가, 주인이 시켰는데도 안 하면 이건 완전 모욕입니다. 맞아요. 여러분. 그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믿으시는데, 도대체 그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주님’이신가요? 교회는 어떤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까? 35절의 표현대로 ‘악한 자’가 있는 게 정상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더 이상 교회라는 데는 ‘악한 자’가 찾지 않는 곳이 되어 버린지 오래입니다. 왜냐고요? ‘악한 자’가 찾아와도, ‘은혜를 아는 자’가 있어야,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받고 회복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마치 예수님 때처럼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또 다른 문제. 교회에 새가족이 잘 정착 못 한다고 호소합니다. 물론 딱히 배척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몰지각한 사람들은 없습니다. 누군가 배척될 정도로 우리가 엮이진 않아서, 늘 새가족 같습니다. 사람들이 교회 올 때 기대하는 바가 있어요. 정해진 그 시간에, 바로 예배를 드리고, 내가 편한 사람들과 적절한 시간을 보내다가 가는 것 말입니다. 즉, 자신이 어떤 교회공동체에 좋은 것 10개가 준비되어 있다면, 8-9개를 누리고 돌아가는 것을 기대하는 거에요. 그러나 처음 오는 사람은 당연히 모든 게 낯설고, 관계가 없기에, 고작 1-2개밖에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 그곳은 좋은 교회가 아니라는 생각에 발길을 끊게 됩니다. 결국 8-9개를 누리는 사람이 자신의 것 4-5개를 떼어 주지 않으면, 그렇게 됩니다. 내가 누구를 적극적으로 소외하거나, 방해하지 않더라도 이런 구도가 고착화되면, 우리는 누군가 누릴 수 있는 것을 앗아가는 거와 마찬가지에요.

사회가 우리를 대할 때 기대하고 보상하는 방식으로, “내게 분업화된 업무분장이 주어지지 않아서 할일이 없고, 내 의무도 아니다”라고 여긴다면 그건 교회가 아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32절을 보면 죄인들도 그만한 일은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존립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존립할 수 없다면, 하나님 나라도 쉽지 않지요

여러분 아시잖아요. 어딘가 새로운 교회를 찾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설교가 들리는 곳을 찾느게 얼마나 어려운지, 전혀 모르는 교회에 처음 가서 예배하고 대화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교회나 목사에게 상처가 있어서, 그 마음 부여잡고 교회 다시 나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잖아요. 우리가 다 그런 사연 하나쯤은 있는 분들이고, 여기 찾아오시는 분들도 그런 사연들 다 있지 않을까요?

아직 많은 것을 주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그래도 이런 사정 뻔히 아는 우리가 먼저 손을 내미는, 은혜를 아는 자가 되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는 믿던 대로 믿으려고, 다니던 대로 다니려고 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니, 교회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은혜를 아는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전복적인 사고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늘 자기중심적으로 합리화하여, 더 후패해지고, 도피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결국 ‘내가 복음이다’로 바꿔놓을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자비로우심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나도 자비로운 사람이 됩시다. 그렇게 삽시다. 먼저 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확장되어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그렇게 살길 원합니다.

손성찬 목사 이음숲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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