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9장 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께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해마다 찾아오는 성탄절에 시간을 덧입혀 봅니다. 직선적인 시간관을 의지하는 세상의 관념으로 예수님의 탄생은 단지 스쳐 지나가는 일상일 뿐입니다. 여기에 무슨 기쁨과 감사가 있겠습니까? 반면에 십자가를 통해 성탄을 바라보는 시간관은 우리 인생이 예상하고 준비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면하게 합니다. 헤롯왕의 시급한 움직임이 있고, 그리스도의 때를 소망하던 자들은 별을 보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어린 예수님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탄생이란 시급을 요하는 하나님의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 첫마디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뒤에 남아있는 소중한 네 것들을 돌아볼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앞만 보고 뛰라는 말씀입니다.

올해의 성탄절은 코로나19를 통하여 직선적인 사고의 느슨함에 빠져있는 우리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바라보게 합니다. 사람들의 사고와 행위방식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전통과 경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한계가 적나라하게 노출된 사건이 전대미문의 코로나19입니다. 과거의 경험이 가져온 종교적 지혜와 조직체계들이 오히려 전염병을 일소하기보다는 더 큰 전염병 전파의 온상으로 자리하고 있고, 교회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긴급한 상황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코로나19의 소멸 시기나 백신의 개발 또는 치사율이 낮다는 것에 관심과 위안을 갖기 보다는 말씀의 요구 앞에 두려움으로 무릎 끓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지금의 상황과 유사한 성경적 상황을 통하여 한국 교회를 향한 주님의 뜻과 계획이 어디에 있는지 접근해 나가는 자세가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기독교의 존재 자체를 부인당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인 십자가와 부활로 인한 고난이나 핍박의 의미는 상실하고, 세속화로 인해 발생하는 비윤리적이고 비상식적인 문제들로 인해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이 땅에 육으로 오신 분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관심 밖에 있는 예수님의 일하심이 바로 영존하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시는 일임을 선포합니다. 언약으로 세상의 창조를 이루신 분이시고, 언약으로 범죄한 인류의 소망이 되셔서 친히 육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죄의 권세를 끊으심으로 당신의 창조 세계가 처음부터 완전하셨음을 성취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영존하신 아버지의 이름에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으로 죄 사함의 약속을 계획하시고, 이끄시고, 성취하신 분으로서의 아버지로 소개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십자가에서의 죄사함으로 인해 죄의 가림을 입은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도된 자들이 자기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세상의 우상에 빠져 살아가는 모습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아들로서 아버지의 일을 다 이루신 한 분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하실 일은 오직 심판과 회복뿐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코로나19의 상황에서 우리 한국 교회가 직면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설교는 넘쳐나면서도 예수님께 입맞춤(시 2:12)이 있는 자들이 희귀하다는 사실입니다. 교회 조직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친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존재성에 대한 은혜와 소망도 발견할 수 없고, 나아가 성도로서의 위대하고 고귀한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는 자도 희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신앙에서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린 자는 철저히 세상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의 무지와 왜곡과 변질은 크리스천의 삶의 공간인 조직 교회의 우상화와 시공간에 구속된 예배의 우상화(한계)를 낳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첫째,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의 우상화라고 말하는 이유는 한국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음으로 죄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는 관심이 없고 세속의 맘몬주의와 교회 공동체의 불신앙의 터 위에 쌓아 올린 상아탑을 마치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보는 것입니다. 물과 불로서 대변되는 십자가의 사랑이 배제되고 인간의 이성적 섬김과 나눔이 중심이 되는 교회란 결국 세상의 기업체나 조직체의 한계를 넘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불법과 탈법이 성행하고 개혁이라는 시대적 요구에도 불구하고 방법론으로서의 편법만 찾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주의 전을 사모한 열심이 자기를 삼킬 것”이라고 말합니다. 교회 자체가 사람들에게 축복을 주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죄의 구속을 소망하지 않는 자에게는 올무가 되게 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란 사람의 생각과 노력으로 세워지는 세상의 조직체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세워지는 시공간을 초월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 계획의 성취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위상의 종국은 심판주의 주님을 두려움과 시급함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둘째, 예배의 우상화를 들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이스라엘에게 언약궤를 빼앗은 블레셋이 언약궤를 통하여 무한승리를 자축하지만 승리는커녕 심판에 처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블레셋은 언약궤를 다른 곳으로 보내기 위해 여호와께 속건제물로 금독종과 금쥐를 바치지만 여호와의 긍휼은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벳세메스 사람들이 언약궤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마주한 결과 5만 70명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던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처럼 예배의 우상화는 여호와의 마음을 깨닫기보다는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었기에 하나님은 그들의 예배를 받으시기보다는 그들을 심판에 처하게 하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의 태도는 죄인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기보다는 언제나 형식의 완벽함과 다양성에 치우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결코 인간의 것을 취하시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성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불신앙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보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언약궤를 중심으로 한 예배만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약궤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죄로부터 자유함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는 예배를 통한 자유함과 평안함보다 여전히 메임과 부담감을 안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셋째, 교회를 하나님의 것으로 보기보다는 자기의 소유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배의 문제에 대한 말씀의 요구는 신앙 안의 시공간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전제로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의 개념이란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직선적인 시간관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현재를 기준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경험과 지식으로 과거와 미래를 기억하고 예상할 뿐입니다. 나아가 공간의 개념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가 소속된 교회와 예배에만 집착할 뿐, 교회 밖은 세속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된 시공간의 개념 속에서는 결코 자유함과 소망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 시대처럼 시간을 뒤로 돌리기도 하시며, 과거의 사람 아브라함은 미래시점의 그리스도의 때를 소망하고, 기뻐하기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성취를 통해서 성도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여행할 수 있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계획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을 통해서 죄가 소멸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적 이해는 십자가로 인해 자유함을 누리는 성도에게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은혜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시공간에 메이는 예배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드릴 수 있는 예배의 당연성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막는 것이 바로 인간의 오염된 경험과 전통의 한계입니다. 마치 율법이 신앙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예배를 상실했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문제는 조직 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성취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지지 못하기에 시공간의 한계에 교인들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음을 인정치 않는 태도입니다. 성도는 인간이 아무리 거짓된 도모를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인간의 도모 그 위에서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코로나19가 한국 교회에 주는 의미는 다시금 주님의 십자가를 회복할 수 있도록 교회와 예배의 갱신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강권적인 역사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율법적 틀에 막혀 십자가로 향하지 못하고 전적인 주님의 은혜를 거부해온 한국 교회의 민낯을 볼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이후 한국 교회는 코로나19와 연관된 세속화와 정치화의 부정적 여파로 인해 조직 교회 활동의 전반적인 변화를 요구받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예배의 다양화가 필연적으로 요구될 것이고, 교회재정의 건전성과 인적쇄신, 교회재정의 감소로 인한 교회규모의 축소, 이단들의 세력확대, 나아가 종교 조직화된 현실에서 노동조합등과 같은 예상해왔던 문제들이 현실로 다가올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문제를 한국 교회 자체의 자정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세속국가를 통해 좋던지 싫던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부끄러움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스스로 개혁할 수 없다는 한계를 뼈저리게 실감해야 합니다. 무너진 일부가 아니라 전적인 교회의 불신앙을 처절히 깨닫고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덧입을 때임을 직시해야만 합니다. 나아가 우리가 쌓아 올린 불신앙의 탑들을 모두 부수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린양의 죽음을 통해서만 죄 사함의 은혜를 덧입을 수 있음을 믿고 십자가 앞에 나아와 통회 자복할 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일을 친히 행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오늘 한국 교회에 주는 은혜는 죄 된 인간이 바라는 화평과 기쁨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심판주로서 우리에게 분리와 검으로 오셨음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십자가라는 버라미터(Barometer), 지표로 우리를 판단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비가 오고 천둥이 치던 날, 한 중학교 학생이 저를 뻔히 보며 느닷없이 질문을 해 온 적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게 뭐예요?” 저는 아무 생각 없이 “글쎄 뭘까?” 하고 되물었어요. 그때 이 학생이 하는 말이 “목사님, 성경도 잘 모르세요? 성경에는 ‘하루가 천년같이, 천년이 하루같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빛도 따라갈 수 없대요.” 학생과의 짧은 대화였지만 이 학생과 헤어지고 나서 머리에 찡하게 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택으로 돌아와 말씀을 대하는 중에 시편 90편 4절의 말씀이 다시 내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바로 이 학생이 내게 한 질문이었어요. 저는 비로소 예수님의 탄생이 스쳐지나간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천년의 한 경점(순간)임을 깨닫게 되었고, 복음이란 그저 기계적으로 전달하는 언어체계가 아니라 천년을 준비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전엔 이러한 생각을 깊이 해보지 않았는데 참으로 어린아이를 통해 은혜를 공급하시는 주님의 동행하심에 깊은 감사와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짧은 시간, 짧은 질문에 신앙의 모든 해답이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던지신 첫마디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단지 예수님의 말씀 그 이상, 그 이하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탄생이란, 하나님 나라를 향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시급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뒤돌아볼 수도 없는 시급을 다투는 십자가의 요구 앞에 세상의 직선적 시간에 눈을 돌리며 스스로 자족하는 태도란 참으로 두렵고 어리석은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멀리서 비추어오는 반짝이는 빛을 따라 생각과 잡념을 다 버리고 쫓아가시기 바랍니다. 발걸음의 끝에는 우리의 모든 번민을 해결해 주실 어린아이가 새록새록 잠들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경배와 찬송을 올리시기 바랍니다. 코로나를 통하여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돌이키게 하시는 은혜가 바로 구유에 쌓인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천년을 하루같이 누리는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정연철 목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미국휴스턴 신학대학원(M. Div.) 졸업
교회갱신 협의회 상임회장
울산노회 증경노회장 역임
기아대책 이사밀알선교회 이사
전국 영남교직자협의회 지도위원
한빛 국제학교 이사
(現) 삼양교회 원로목사

■ 저서
『행복을 디자인하는 전도자』, 『교회를 세우는 성령』, 
『부르신 곳에서』, 『하나님의 호의를 입은 그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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