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3장 19-25절

“혹은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받나니 그의 생명은 음식을 싫어하고 그의 마음은 별미를 싫어하며 그의 살은 파리하여 보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던 뼈가 드러나서 그의 마음은 구덩이에, 그의 생명은 멸하는 자에게 가까워 지느니라 만일 일천 천사 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중보자로 함께 있어서 그의 정당함을 보일진대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사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 그런즉 그의 살이 청년보다 부드러워지며 젊음을 회복하리라”

1. 갑작스런 엘리후의 등장
이제는 지상파 방송보다 케이블 방송이 더 잘나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뉴스도 그렇고, 오락 프로그램도 그렇습니다. 케이블 방송에 참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많습니다. 그런데 케이블 채널을 보다 보면 불편한 점이 있습니다. 방송 중간에 광고가 들어간다는 점입니다. 특히 오디션 프로그램은 1등을 발표하기 직전에 어떻게 합니까? “대망의 1등은…… 둥둥둥~ 60초 후에 공개합니다!” 금방이라도 발표할 것처럼 하더니 광고를 보냅니다. 시청자들은 결과가 궁금하니까 60초 동안 어쩔 수 없이 광고를 봐야만 합니다.

재밌는 것은, 오늘 우리가 읽은 욥기의 말씀이 딱 그와 같은 진행을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의 주장은 25장을 끝으로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26장부터 31장까지는 욥이 최후의 변론을 하듯이 자신의 견해를 밝힙니다.

“누구든지 나의 변명을 들어다오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나를 고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고소장을 쓰게 하라” (욥 31:35)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제 할 말은 다 했다는 겁니다. 남은 일은 하나님께서 대답을 해 주는 것입니다. 욥은 지금 그런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욥기를 함께 읽고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그런 기대감이 생깁니다. 욥과 친구들이 대화를 충분히 했으니, 침묵하고 계시던 하나님이 이제 등장하셔서 말씀하시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 마련입니다. 32장 1절을 봅시다.

“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이 말을 그치니” (욥 32:1) 친구들은 욥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고 더 이상 할 말도 없습니다. 누가 봐도 하나님께서 등장하실 타이밍입니다. 그런데 32장 2절에 뜬금없이 새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

‘엘리후’는 왜 갑자기 등장을 한 것일까요?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갑작스러운 엘리후의 등장은 매우 부자연스럽습니다. 이야기의 전개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까지 욥의 친구는 3명만 있는 줄 알았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 한 명이 더 있었다는 말입니다. 처음부터 4명이라고 말했더라면 자연스러웠을 텐데, 엘리후의 등장은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욥기가 막장드라마는 아니지만 이런 전개는 막장드라마와 비슷합니다. 대중문화사전을 찾아보면, 막장드라마란 보통의 삶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자극적인 상황이나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이어지는 드라마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남자와 여자가 연애를 하다가 이제 결혼을 하려고 양가 상견례를 했는데 알고 보니 어릴 적 헤어진 남매였다는 설정이죠. 또 시어머니가 화가 난다고 김치 포기로 며느리의 뺨을 때리는 경우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욥기가 막장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왜 이토록 갑작스럽게 엘리후라는 인물이 등장했는가 생각해 볼 필요는 있습니다.

2. 엘리후는 누구인가
그렇다면 엘리후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그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 본문에 등장합니다. 우선 이름의 뜻은 ‘그는 나의 하나님’입니다. 아주 경건한 이름이지요. 엘리야와 비슷한 의미입니다. “엘리후는 그들의 나이가 자기보다 여러 해 위이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화를 내니라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뒷전에서 나의 의견을 감히 내놓지 못하였노라” (욥 32:4-6)

짐작해 보자면 엘리후는 친구들에 비해 어리기 때문에, 처음부터 욥과 친구들의 대화를 들으면서도 감히 끼어들 엄두를 못 낸 것으로 보입니다. 자, 그럼 엘리후에 대해서 정리를 해 봅시다. 엘리후는 욥과 세 명의 친구들의 대화를 처음부터 듣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들에 비해 어리며, 또 람 종족인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입니다. 구체적인 집안 내력을 밝힌 것을 보면 상당히 뼈대 있는 집안 출신으로 보입니다. 앞서 욥의 세 친구를 소개한 것과 비교가 되죠. 세 친구는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고만 했지, 집안 소개는 없었습니다. 반면 엘리후는 상당히 유명한 집안 출신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엘리후는 왜 갑자기 등장했을까요? 욥기 32장 2절과 3절 말씀을 보면, 엘리후는 등장하자마자 화부터 냅니다. 욥에게는 하나님보다 어떻게 더 의로울 수 있냐고 화를 내고, 세 친구에게는 욥을 설득하지도 못하면서 욥을 정죄한다고 화를 냅니다. 그래서 이제 자신이 나서겠다는 것이지요.

“욥 어른께서는 들으십시오. 세 분 친구가 놀라서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분들은 어른께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내가 그들이 입을 다물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이제 그들은 할 말도 없으면서, 그냥 서 있기만 합니다.” (욥 32:15-16, 새번역)

엘리후는 욥과 친구들, 어느 편도 들지 않습니다. 양쪽에 다 불만이 있습니다. 마치 평행선을 달리는 기찻길과 같은 욥과 친구들을 보면서 화가 나는 것입니다. 엘리후가 보기에 이들은 대화를 통해서 접점을 찾을 생각이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그런 모습이 너무 답답했던 엘리후는 32장 18절과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새번역성경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고, 말을 참을 수도 없습니다.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하면, 새 술이 가득 담긴 포도주 부대가 터지듯이, 내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엘리후가 말하는 표현을 보면 분명히 의욕이 넘치고 다소 거만한 모습도 보입니다. 그러나 욥과 친구들에 비해 많이 어리기 때문에 치고받고 싸우는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잠잠이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꾹 참고 있던 화를 토해냅니다.

그러나 그냥 화를 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양쪽의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고통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합니다. 절대 만날 수 없는 기찻길처럼 보이던 양쪽을 중재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이를 통해 앞으로 직접 말씀하실 하나님의 길을 준비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3. 우리 시대의 엘리후
여러분이 보기에는 엘리후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저는 어린 엘리후가 어른들을 향해 화를 내고 자기주장을 펼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오늘 우리 시대의 청년과 청소년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엘리후의 모습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청년, 청소년 세대의 울음소리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엘리후의 모습에서 오늘 우리 다음 세대의 절규가 보이지 않습니까? 나이가 어려서 어설프지만, 그런 자신이 답답해서 울고 있는 우리 청년 세대와 청소년 세대가 바로 또 다른 엘리후입니다.

공부하면 할수록 빚이 늘어가고, 사회에 나오기도 전에 신용불량자가 되고, 학비를 벌기 위해서 또는 취업이 되지 않아서 최저시급을 받으며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건강이 망가졌습니다. 기성 세대가 갈등을 잘 해결하고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침묵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점점 어그러져 가는 모습을 보고 절망합니다. 결국 입을 열어 외칩니다. 흙수저, 금수저, 헬조선, 열정페이……. 이런 가슴 아픈 탄식이 나옵니다. 이건 단지 사회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엘리후입니다. 우리 자녀가 엘리후입니다. 우리의 청년들이 엘리후입니다. 우리의 다음 세대가 엘리후입니다. 물론 어린 엘리후들의 모습은 어설픈 것이 많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외침처럼 보이고 군중의 분위기에 취해서 휩쓸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엘리후도 마찬가지입니다. 완벽하지 않습니다. 나이도 어리고 발언하는 내용도 조금은 건방지게 보입니다. 32장 9절을 보십시오. 새번역성경으로 읽어드립니다.

“사람은 나이가 많아진다고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며, 나이를 많이 먹는다고 시비를 더잘 가리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상당히 건방진 말투처럼 보입니다. 또 33장 5절과 6절도 보십시오.
“대답하실 수 있으면,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토론할 준비를 하고 나서시기를 바랍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어른이나 나나 똑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흙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새번역) 얼마나 자신감이 넘칩니까? 반론할 테면 해 보라고 도전적으로 제안합니다. 건방져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거칠고 당찬 말 속에 새로운 희망이 있습니다. 새로운 시각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아직 완벽하지 않지만, 더 나은 신앙과 하나님을 향한 소망의 몸부림이 그 속에 묻어 있다는 말입니다.

4. 엘리후의 새로운 시각
그 소망의 몸부림이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을 살펴봅시다. “혹은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받나니 그의 생명은 음식을 싫어하고 그의 마음을 별미를 싫어하며” (욥 33:19-20)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개역개정판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두세 번 읽지 않으면 무슨 내용인지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새번역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질병을 보내셔서 잘못을 고쳐 주기도 하시고, 사람의 육체를 고통스럽게 해서라도 잘못을 고쳐 주기도 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병든 사람은 입맛을 잃을 것입니다. 좋은 음식을 보고도 구역질만 할 것입니다.” 엘리후는 욥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서 세 친구와는 전혀 다른 시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욥은 죄를 짓지 않은 자신이 고통당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고, 세 친구는 욥을 그저 ‘인과응보’의 원리로 정죄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엘리후가 말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고통이라는 것이 항상 인과응보의 원리로만 해석할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사람이 겪는 고통이 때로는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다른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질병을 보내셔서 사람의 잘못을 고쳐 주기도 하신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욥과 친구들이 논쟁하던 고통의 이유에 대해서 아주 다른 시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본문을 보십시오.

“이제, 그의 목숨은 무덤에 다가서고, 그의 생명은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천사 천 명 가운데서 한 명이 그를 도우러 올 것입니다. 그 천사는 사람들에게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상기시킬 것입니다.” (욥 33:22-23, 새번역)

분명 질병과 고통으로 인해서 죽을 것 같은 어려움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욥을 도우실 것이고,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깨닫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통에 대한 엘리후의 이해는 앞서 논쟁한 욥과 세 친구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욥과 친구들이 지금까지 이해하고 있던 인과응보의 원리를 뛰어넘고 있습니다. 엘리후의 해석이 완벽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분명 네 사람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고통을 ‘하나님께서 사람을 고치시는 과정’으로 바라봅니다. 엘리후의 해석이 100%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갈등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화해의 길을 열어주고, 평행선을 달리던 의견이 하나로 모아지는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견을 제시하면서 엘리후가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25절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다시 젊음을 되찾고, 건강도 되찾을 것입니다.” (새번역) 엘리후는 욥에게 희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욥은 희망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 따지고 들며 소송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고통을 통해서 자신을 고치시고 회복시키기 위해 준비하고 계신다고 믿고, 소망을 갖게 됩니다. 친구들은 어떻습니까? 고통을 그저 차가운 인과응보의 원리로만 이해하며 정죄하던 모습에서 새로운 해석을 배우고 돌아설 수 있을 것입니다.

5. 엘리후에게 주목해야 하는 이유
엘리후의 이런 시도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대단히 중요합니다. 완벽한 정답이라서가 아닙니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완벽한 해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고통은 당사자가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완벽한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엘리후의 시각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중요한 메시지는 평행선을 달리던 양측이 만날 수 있도록 조정하는 데 있습니다. 이웃을 화해시키고 갈등을 풀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시 소망이 있음을 선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욥과 친구들을 보십시오. 이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성경공부도 열심히 하고, 예배도 열심히 드렸을 것이며, 기도도 열심히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갈등했고 다투었고 문제 해결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습니까?

인생을 살다가 새로운 사건이 발생했을 때, 자신들이 물려받은 신앙 체계와 성경공부가 그 사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욥을 보십시오. 갑작스레 만난 고통을 지금까지 드린 예배와 성경공부로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욥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난 것이지요.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성경을 열심히 공부했는데, 또 기도를 열심히 했는데, 예배를 열심히 드렸는데,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들에게 지금 그런 종교 행위가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 부족한 것입니까? 문제를 믿음으로 해결하는 능력입니다. 자신들에게 벌어진 인생 경험을 하나님을 향한 소망으로 해석할 수 있는 훈련이 부족했습니다.

2009년 1월 15일에 미국 뉴욕 라구아디아 공항에서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샬롯으로 가기 위해 U.S. Airway 소속의 항공기가 이륙했습니다. 그런데 이륙하자마자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거위 떼와 부딪히면서 양쪽 날개 엔진이 모두 망가진 것입니다. 이 비행기에 승무원과 승객이 모두 155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왼쪽 엔진에 불이 나는 것을 승객들이 보았습니다.

당시 비행기는 설렌버거(Chesley Sullenberger)라는 조종사가 운행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베테랑 조종사라도 이런 아찔한 일을 경험해 보았겠습니까? 아니요. 완전히 처음이지요. 여기서 설렌버거 조종사는 긴급하게 결정을 내립니다. 비행기를 공항으로 돌려서 안전하게 착륙할 시간도 없고, 속도나 고도가 모두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그래서 비상수단으로 뉴욕의 허드슨 강에 비상착륙을 시도했습니다. 결국 극적으로 155명이 모두 목숨을 건졌습니다.

조종사는 수많은 시간 동안 비행 훈련을 하고 자신을 준비시켜서 조종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새 떼를 만나서 엔진이 멈춰버리는 경험을 직접 당해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조종사는 훈련을 통해 비상사태를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비상상태를 비극이 아니라 희망으로 이끄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문제 해결 능력입니다. 물론 모든 문제 해결은 하나님께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갖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가 왜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성경을 공부합니까? 그냥 여가를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낯선 문제가 찾아올 때, 그것을 믿음으로 해결하는 문제 해결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소망을 잃어버린 세상을 향해 소망을 선포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찻길처럼 평행선을 달리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하시고, 아픈 것을 고치시고, 약한 것을 강하게 하시고, 갈등을 평화로 바꾸시는 분임을 선포하는 교회가 되길 소원합니다.

문제가 우리 앞을 가로막아도 희망은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길이요, 희망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인생의 문제를 잘 극복하고 이겨내는 은혜가 성도님들 위에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허요환 목사

전남대학교 경영학과(B.B.A.) 졸업
미국 루이빌신학대학원(M.A.R.)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신대원(M.Div.)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Th.M.) 예배설교학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신학박사(Th.D.)
(前) 장로회신학대학교 실천신학 교수
(現) 안산제일교회 담임목사
Author

M.T.S / 교회성장 컨설팅 및 연구 프로젝트 진행 / 국제화 사역 / 월간 교회성장, 단행본(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필독서) 등을 출간하고 있다. M.T.S (Ministry Training School) 는 교회성장연구소가 2003년 개발하여 13회 이상의 컨퍼런스를 통해 한국교회에 보급한 평신도 사역자 훈련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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