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5장 22-23절, 데살로니가후서 3장 5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지난 30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크게 가렸을 때가 언제였는지 돌아보면 담임목회를 시작하고 첫해에 맞았던 부흥회 직후였습니다. 저로 인해 성도들이 시험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부흥회 후에 온 성도에게 은혜가 충만했을 때 주일예배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예배 중 한 성도가 발언을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가끔 교회에 나오는 분이셨는데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앞에 나와서 인사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그 교회는 대학가에 있어 청년들이 많았고 예배 분위기도 자유로웠기 때문에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정신적으로 병력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점점 큰 목소리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습니다. 당시 젊은 나이였고 첫 담임목회였기 때문에 경험이 부족했던 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을 끊으려고 해도 그분은 마이크를 놓지 않았고, 점점 서로의 언성이 높아졌습니다. 사회자로서 그냥 둘 수가 없어 결국에는 큰소리를 냈습니다. 물론 그 상황을 제지하기 위한 선택지가 없었고 성도들도 이해한다고 했지만, 시험을 받은 분들이 있었습니다. 분노하는 모습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제가 분노를 참지 못해서 일으킨 실수였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위였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도 분노를 참지 못했던 경우가 나옵니다. 민수기 20장에 나오는 모세입니다. 가데스에서 모세도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모세가 백성들 앞에서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 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위를 명하여 물을 내라고 지시하셨지만, 그는 지팡이를 들어 반석을 두 번이나 내려쳤습니다. 끊임없이 불평하는 백성들 때문에 심신이 지치고 분노가 차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행동을 불신의 행위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리는 행위였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안타까운 결과를 맞이한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화를 참지 못해, 평생 후회할 말을 버럭 해버리거나 돌이키고 싶은 일을 저지르고 말 때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세상에 보냄을 받은 그리스도의 대사라고 성경은 말씀하셨는데, 참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성령의 네 번째 열매인 오래 참음은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그런데 이 열매 역시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열매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의지적으로 참고 버틴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의지로 참다 보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기거나 쌓이고 쌓여 폭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종종 보게 되는 ‘묻지마 폭력’ 사건이 이런 데서 생기는 게 아닐까요? 체면 사회인 우리나라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누르며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건강하지 못한 방식으로 폭발하거나 아니면 가족처럼 가까운 사람들에게 발산하고 맙니다.

인간적인 노력이나 의지로 참고 견디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의 열매 오래 참음이 아닙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 내적 변화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그리스도의 성품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먼저 ‘그리스도의 인내’를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살후 3:5)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매우 자랑스러워했던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계속해서 믿음 안에 거하며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을 향해 바울은 “주께서 너희 마음을 계속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이르기를 원한다”라고 축복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이르라’가 축복의 키포인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예수님의 인내 안에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1. 예수님의 인내

1) 무리를 향한 인내

예수님은 인내를 어떻게 보여주셨습니까? 먼저 ‘죄인을 참으심’에서 보여주셨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무리는 그릇된 동기를 가지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만들어 자신들이 잘살게 될 것을 바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셨고, 언젠가 자신을 버릴 줄도 아셨습니다. 그러나 참고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늘 불쌍히 보셨고, 마음의 병과 육신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최근에 마태복음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죽은 후 예수님께서 애도하기 위해 홀로 떠나셨는데, 무리는 그곳까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그들의 병을 고치시고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저녁이 되었을 때 제자들은 무리를 빨리 보내라고 재촉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까지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끝까지 죄인들을 참으시고 받아주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 이렇게 간구합니다.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저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고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향해 인내하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참 우리와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는 때로 세상이 싫고, 사람이 싫습니다. 매일 낙심하여 마음이 지칩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참고 인내하셨습니다.

2) 제자들을 향한 인내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도 인내를 보이셨습니다. 무리와는 달리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행하며 먹고 마시는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무리와 다른 모습을 보여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역시 무리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제자들은 자리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곧 예수님이 유대 왕이 되실 텐데 그때 누가 중심에서 벼슬을 누릴 것인지 논쟁이 일었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은 30에 예수님을 무리에게 팔아버렸고, 다른 제자들도 결정적인 순간에 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까운 자들에게 인내하지 못합니다. 가족에게 인내하지 못하고, 믿음의 지체들에게도 인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참고 인내하며 사랑하셨습니다.

3) 십자가의 인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2)

예수님은 또한 십자가를 참으며 인내를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허락한 고난으로, 매우 큰 아픔이며 쓴 잔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십자가를 참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앞에 놓인 기쁨, 십자가의 결말에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자체는 고통이었지만, 십자가를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기에 결과가 반드시 축복이요 기쁨이라는 것을 아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각기 삶의 고난이 다가오는데, 어려움에 대응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을 주목하며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는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책임지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떤 어려움이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면 그 역경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결과는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붙잡아야 하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2. 인내를 위해 우리가 붙잡을 것

1) 하나님의 소망

예수님을 주목하면 소망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죄가 왕성한 세상이지만, 하나님은 세상을 버리지 않으셨고, 예수님은 그런 아버지의 사랑을 붙드셨습니다. 사랑으로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소망을 예수님께서 굳게 붙잡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소망으로 세상을 끝까지 사랑하며 죄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하나님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 세상’ 안에는 저와 여러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언젠가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올 것을 아시고 포기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버리지 않고 소망으로 오래 참아주신 예수님의 인내가 느껴지십니까?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벧후 3:15)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곧 우리의 구원이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참지 않으셨다면 과연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소망으로 참으셨기에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 안에 내가 있고, 여러분이 있고, 우리의 가정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가정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십니까? 기도할 때 눈물이 나십니까? 그것은 여러분을 통해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눈물입니다. 자녀를, 부모를, 형제를 더 사랑하고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을 이유가 됩니다.

선한 일을 하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면서 응답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소망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치는 이유는 소망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것 세 가지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역사를 이루고 사랑은 수고를 이루고 소망은 인내를 이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살전 1:3)

여러분, 예수님이 붙잡으셨던 아버지의 소망을 우리도 붙잡읍시다. 가족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주님의 선한 일을 하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중보하면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것을 기억합시다.

2) 하나님의 약속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그의 약속을 붙잡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일점일획이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을 확신하셨습니다. 어떤 고난과 어려움도 이미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 생기는 일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 아버지의 약속 위에서 이루어져 갔습니다. 십자가를 참을 수 있었던 이유도 아버지의 약속을 온전히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자녀를 위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며 새벽기도에 나갔습니다. 그날 주신 음성이 야곱의 첫 아내 레아에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레아가 남편 야곱에게 사랑을 못 받고 슬퍼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너는 복을 받고,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렇게 낳은 첫아들의 이름은 ‘르우벤’이었는데, 이는 ‘아들을 보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돌아보시고 아들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시므온’은 ‘듣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간구를 들으셨다’는 의미로 지은 이름입니다. 셋째인 레위는 ‘연합’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레아는 남편 야곱에게 사랑받지 못했지만, 자녀 레위와의 연합하고 레위는 하나님과 연합함을 의미합니다. 넷째 유다는 ‘찬양’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더는 슬퍼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리라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입니다. 이렇게 레아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오늘을 살아가는 저에게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도 이러한 소망이 있고 약속이 있습니다. 그 소망을 붙잡고, 그 약속을 붙잡고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내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의지로 참고 버텨내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주님의 오래 참으시는 성품이 우리 안에 이뤄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성품을 주목하며 그의 오래 참음을 사모해 봅시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인내에 이르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김승욱 목사

(前) 남가주 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現) 세계변혁운동 Transform World 국제운영위원장
(現) 할렐루야교회 담임목사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