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장 1-9절

…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맹상군의 일화

사마천의 『사기: 열전』을 보면 ‘맹상군의 일화’가 나옵니다. 제나라의 재상인 맹상군은 주변에 덕이 많다고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고 그의 집에는 3,000여 명의 식객이 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풍환’이라는 볼품없는 사람이 찾아와서 식객으로 머물겠다고 청합니다. 풍환은 특별한 재주나 특징이 없었기에 맹상군은 그를 식객으로 받아주긴 했으나 귀하게 대접하진 않았습니다.

맹상군은 많은 식객을 거느리기 위해서 돈놀이를 시작하게 됩니다. 맹상군은 특별한 재주 없어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했던 풍환에게 이자를 걷어오는 일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풍환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합니다. 이자를 걷어서 돈을 빌려 간 사람들에게 술과 고기를 실컷 사 먹이는 겁니다. 이자를 내지 못하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차용증을 아예 불살라버립니다.

맹상군은 엄청나게 화가 났습니다. 식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돈놀이까지 했는데 그 이자를 다 써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차용증까지 태워버렸으니 앞이 깜깜했습니다. 화가 난 맹상군에게 풍환은 아무렇지 않게 말합니다.

“술과 고기가 있어야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돈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가려낼 수도 있습니다. 돈이 있는 자는 날짜를 정해주고 이자를 내게 했습니다. 반면 가난한 자는 10년이 걸려도 이자를 내기 어려우니 계속 달라고 하면 오히려 도망갈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예 문서를 불살라버린 것입니다. 어차피 받지 못할 돈을 포기하면 대신 공의 명성이 드높아질 것입니다.”

정말 풍환의 말대로 백성들 사이에서 맹상군의 명성이 높아졌습니다. 제나라 왕이 맹상군의 인기를 시기할 정도로 명성이 대단했습니다. 결국 제나라 왕은 맹상군을 시기하여 벼슬에서 물러나게 합니다. 그러자 그 많던 식객들이 하루아침에 모두 맹상군을 떠났습니다. 그때 유일하게 맹상군 곁에 남아 있던 사람이 풍환이었습니다.

맹상군 곁에 남은 풍환은 능력을 발휘하여 맹상군을 다시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합니다. 맹상군이 다시 재상의 자리에 오르자 떠나갔던 식객들이 다시 몰려들었습니다. 이때 마음이 상한 맹상군은 다시 자신을 찾아온 식객들을 보면서 화를 참지 못합니다. 풍환이 맹상군에게 다시 말합니다.

“돈이 많고 벼슬이 높은 자에게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공이 벼슬을 잃었을 때 떠났다가 벼슬을 찾았을 때 다시 돌아오는 식객들을 막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을 받아들인다면 공은 더욱 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풍환이라는 사람은 지혜롭게 처신하며 맹상군을 덕장으로 만들어 줍니다. 무엇보다 풍환이라는 인물은 ‘어떤 것이 자신의 삶에 더 유익한지’ 잘 분별했던 사람입니다. 분별력이 있었기에 지혜로운 선택을 유도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 유익한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에너지를 집중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분들은 평생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삶의 시간과 힘을 투자합니다. 어떤 분들은 평생 돈을 위해서 자신이 가진 것을 투자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자신의 업적, 자아성취를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보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의 생각대로 살았습니다. 자신이 유익하다고 생각한 기준과 가치를 따라서 살아갑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했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맞는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바울은 율법의 기준에 어긋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예수님을 증거하던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갈 때 사람들의 옷을 맡고 있던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성경은 당시 바울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행 8:1)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조리 잡아서 고문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인물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기준과 뜻대로 살아 하나님과 점점 더 멀어졌습니다.

내가 유익하다고 생각한 대로 사는 것이 정답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유익하다고 판단하는 기준과 가치가 온전하지 못하기에 내 생각과 뜻에 따른 선택은 점점 하나님과 우리를 멀어지게 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

사무엘상 2장을 보면 엘리의 아들이었던 홉니와 비느하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온 사람에게 종을 시켜 말합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제물 중에 제사장의 것을 먼저 내라.”, “제사장이 삶은 고기를 원하지 않고 날 것을 원한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온 사람은 “하나님께 먼저 드리고 난 후에 마음대로 가지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홉니와 비느하스는 “지금 당장 내놔라. 그렇지 않으면 강제로 빼앗겠다”고 말합니다.

뭔가 순서가 바뀐 것 아닙니까? 하나님보다 제사장에게 먼저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동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자신의 삶에 유익한 대로, 자신의 배만 불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과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기준에 따른 삶 = 하나님과 거리두기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자신의 기준대로 하나님과 아주 먼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까 바울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겁니다. 바울에게 예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바울은 예수님의 음성에 충격을 받습니다. 자신에게 들린 예수님의 음성은 지금까지 배우고 쌓아왔던 삶의 모든 결과물을 부정했습니다. 로마 시민권자요, 가말리엘 문하생이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자신이 연구했던 율법과 학문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했습니다. ‘분명 예수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일 수가 없다.’

자신이 세운 기준과 판단에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그것이 자신에게는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부정했던 그 예수님의 음성이 선명하게 들려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때 바울은 깨닫습니다.

“내 기준이 잘못된 것이구나. 내 판단이 잘못된 것이구나. 진짜 기준, 진짜 유익함은 여기 있었구나!”

자신의 기준이 무너지고 나서야 진정으로 가치 있는 기준이 무엇인지 깨닫습니다. 바울이 발견한 것이 무엇입니까?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유익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바울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유익한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쏟아냄은 힘을 빼는 것으로부터 출발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삶의 모든 힘을 빼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주님이 내 인생을 다스리시도록 맡겨드리기 위해서는 내 기준이 무너지고 내 힘이 빠져야 합니다. 잔뜩 힘이 들어가 있으면 가라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 힘이 빠져야 우리의 인생이 은혜의 부력으로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보통 자녀들은 철이 없을 때 부모님의 은혜를 잘 모릅니다. 부모님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것을 당연하게 느낍니다. 때로는 “누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냐고, 엄마가 해준 게 뭐가 있어!”라며 부모님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자녀들이 이렇게 말하는 그 마음의 중심에는 ‘내 인생은 내 것! 내 힘으로 충분히 살 수 있어!’라는 교만한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인생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으니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는지, 무엇이 감사한지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삼손, 힘이 빠질 때 가장 강했다

사사기에 등장하는 삼손을 보십시오. 그는 블레셋 민족에게 두 눈이 뽑혀 잡혀가기 전까지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그는 자신의 기준대로 힘을 사용했고 자신의 강함을 철저히 신뢰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들릴라에게 속아 머리가 밀리고 여호와의 영이 그를 떠나면서 힘을 잃게 됩니다. 두 눈이 뽑힌 채로 블레셋 민족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삼손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아, 그렇구나! 내가 가진 힘의 주인이 내가 아니구나.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자신의 강함이 무너지고 모든 힘이 빠진 후에야 삼손은 무엇이 자신의 기준인지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따라서 살아야 하는지 깨달은 것입니다. 무엇에 자신의 전부를 집중해야 하는지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셔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자신의 힘이 아닌 자신의 온 힘이 빠졌을 때 삼손은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고 두 기둥을 무너뜨립니다. 그때의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삿 16:30)

삶의 진정한 유익함은 우리의 힘이 빠지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기 시작할 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이 자신이 생각하기에 유익한 것을 쫓아 살아갑니다. 무엇이 유익합니까? 언제나 바르고 곧은 길, 영원히 변하지 않는 생명의 길 되신 예수님이 가장 유익합니다. 그러기에 내 뜻대로 사는 삶이 좋은 삶이 아니고 주님 뜻대로 사는 삶이 좋은 삶입니다.

무엇에 여러분의 에너지를 쏟으실 겁니까? 예수님께 쏟으십시오. 예수님께 우리의 에너지를 쏟아내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을 빼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그렇게 될 때 예수님이 우리의 기준이 되고, 주님이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그런 믿음의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윤성 목사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서울신학대학교 일반대학원 선교신학(Th.M.)
(現) 증가교회 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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