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2장 41절-46절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추수감사절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곡식을 거두게 하신 것과 풍요로움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올려드리는 절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정도의 감사는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습니다. 농촌에서 곡식을 거두면 농부는 정말 행복합니다. 풍년이 들면 더욱 행복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도 열매를 거두면 기뻐하며 자신이 믿는 신에게 감사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제사로 드려야 할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나의 주를 고백함에 감사

본문 이전에는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계속 질문을 했는데 이제 본문에서는 거꾸로 예수님이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그들은 대답합니다. “다윗의 자손입니다.” 이 대답은 잘한 것입니까? 충분한 대답입니까? 다윗은 이스라엘을 통치한 위대한 왕입니다. 그분의 자손이라고 답했으니 굉장한 대답처럼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많이 부족한 대답입니다.

예수님을 높게 평가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다윗 이상은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한 일은 다윗이 한 일, 즉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이스라엘 왕으로 있었던 그 이상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이스라엘 한 나라만을 통치하시는 분으로 제한하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에게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라고 주님께서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를 먹고 사는 문제나 자녀, 사업의 어려움 등을 해결해주는 분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충분히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44절에서 시편 110편을 인용하여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다윗보다 위에 계시는 분”임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다윗은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며 그분을 “이스라엘을 통치하실 뿐만 아니라 온 세계를 통치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입니까? 나의 주인이십니까? 그리스도는 나 한사람을 위해, 나 개인의 잘됨을 위해, 내게 세상 것을 잘 먹이고 입혀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한 나라를 포로생활에서 벗어나 평화롭고 번영하는 나라가 되도록 구원하시는 메시아 정도가 아니라 원수를 발아래 두시고 통치하시는 분, 온 세계 열방을 구원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다윗이 성령의 감동으로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했듯이 우리도 ‘주’를 고백할 수 있다면, 죄로부터 건짐 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 힘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감동시켜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아무도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할 자가 없습니다. 오늘 내가 주님을 ‘나의 주’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 고백이 바로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근원적인 이유가 됩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시40:2)

오래전 자동차가 진흙탕에 빠졌던 경험이 있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자동차를 끌어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가속페달을 밟으니 점점 더 깊숙이 빠져들었습니다. 결국 견인차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악에 빠진 우리는 힘쓰고 애쓸수록 오히려 더욱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나의 주되신 주, 그리스도께서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인 죄악에서 끌어올리셨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건져만 내시고 그냥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반석 위에 우리를 세우시고 견고하게 우리의 걸음을 이끌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지금 주변을 돌아보면 코로나19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뒤늦게 찾아온 태풍과 폭우로 인하여 벼가 모두 누워버려 추수를 할 수 없는 농부들도 있다고 합니다. “지금 온 나라 경제가 말이 아니고 얼마나 힘든데… 내 몸은 이렇게 망가져 가고 있는데… 무슨 감사인가?” 현실적으로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하나님!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제게는 아무 열매도 없습니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하나님께서는 지금 열매를 맺어 가고 계십니다. “지금 당장 그 어떤 열매가 없지만 기가 막힌 웅덩이에서 나를 건지신 나의 주”,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감사를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감사의 근거는 현실 문제의 해결에 있지 않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볼 수도, 그 음성을 들을 수도 없던 우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도 못하는 우리(롬 3:23)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어 주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되었고 죄악의 수렁에서 건짐 받았으니 이보다 더 큰 감사가 어디 있을까요?

둘째, 열매 맺는 자리로 인도하시는 주님께 감사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죄악의 구덩이에서 건져 올리시기만 하고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시고 내 걸음을 견고케 하사 내 걸음을 열매 맺는 자리로 인도하시니 이것이 바로 내가 감사드릴 수 있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하나님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찌하여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고통스러워해야 합니까? 왜 포로생활을 해야 합니까? 공의와 정의는 어디 있나요?” 항의하듯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설명하십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리고 계속 말씀하십니다. “바벨론이 강하고 가진 것이 많아서 네가 불평하느냐? 그렇게 강한 바벨론도 결국은 망한다. 그 바벨론도 내가 통치하고 있단다. 내가 모든 것을 이끌어가고 있단다.”

그때부터 하박국은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상황은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라는 말씀처럼 나를 깊은 수렁에서 건져내신다는 믿음, 나를 이끌어서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그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나니 그에게 찬송이 시작된 것입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합 3:16-19)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림으로~” 이 얼마나 절정의 고백입니까? 자신의 뼛속까지 아픔이 찾아오는 순간에도 하박국에게는 깊은 수렁에서 건져내신 주님, 건져내실 뿐만 아니라 열매 맺는 자리까지 이끌어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노래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께서 지휘하시며 이끌어 가심을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주님이 가라 하시면 가는 것이고 멈추라 하시면 멈추는 것입니다. 주가 인도 하시는 대로 따르는 우리의 모습은 사슴의 발처럼 높은 곳으로 뛰어다닐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욥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육체의 질고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욥의 주변 사람들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의인이었고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인데 왜 이런 상황을 만드셨을까?’ 욥 자신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도 하나님은 열매를 맺고 계셨습니다. 끝 부분에 가서야 욥은 이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불평하고 원망하며, 아파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열매를 맺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깨달음이 욥에게는 무엇보다 귀한 열매였습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 42:2-6)

이치만을 따지며 보냈던 그 시간을 부끄러워하며 “이제야 귀로 들었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눈으로 보았던 하나님을 만질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그 자체가 욥의 열매입니다. 그 고백 이후 욥은 처음보다 더 많은 복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은 욥을 방치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방식대로 원하시는 열매를 맺어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들을 갑절로 공급하셨습니다.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사과나무인데 왜 감이 열리지 않느냐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신이 온전한 사람입니까? 정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그처럼 비정상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원하는 열매를 맺어야지, 내가 원하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내가 원하는 열매가 없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거 맞느냐고 한다면 분명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원하시는 열매를 맺어 가십니다. 어떤 때는 보이지 않는 열매를 맺고 계십니다. 내 내면의 열매를 맺게 하시고, 더욱 성숙의 자리로 열매를 맺어 가시고, 우리의 필요를 갑절이나 더하시는 열매도 맺게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있는 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이 원하시는 열매를 나에게 맺게 하십니다.

인생의 꽃은 감사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가장 아름다운 꽃이 감사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자들과는 상대를 할수록 힘들어지는데 그가 아직 미성숙하다고 생각하고 조금씩 감사의 자리로 갈 수 있게 만드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소중한 역할 중의 하나입니다. 사실, 감사가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자식도 부모에게 감사할 때 부모는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다른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목회자도 성도들이 감사하다는 한마디에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피곤한 줄 모르고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사단은 그것을 알기에 우리가 감사를 못하도록 늘 막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 자체가 감사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도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감사는 현실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라는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나’라는 가지에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의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현실을 뛰어넘어 하나님께서 진정 내게 주신 은혜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나를 구원하셔서 깊은 수렁에서 건지신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 가운데 가장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이 믿음으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성도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임석순 목사

영국 웨일즈대학교 철학박사
(現) 기독교 사이버대학교 총장
(現)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원장
(現) 한국중앙교회 담임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