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4장 16-22절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붉은돼지라는 애니메이션에 나왔던 대사인 “좋은 사람은 언제나 먼저 가버려”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세상이 좋은 사람을 그냥 두질 않습니다. 반대로 얘기하면 세상은 좋지 않은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라는 말이 될 수도 있겠네요. 좀 더 약고, 좀 더 악하고, 좀 더 독한 사람들이 살기 좋은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봐도 알 수 있지요. 혹시 세상이 살만한 곳이라고 느끼신다면,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말은 아직 세상을 객관화시켜 통찰할 정도가 아닌 자신의 미숙함에 대한 증표이자, 혹은 자신이 타인에 대해 관심 없이 이기적으로만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래도 이 세상을 조금이나마 나은 곳으로 세우고자 하는 인간의 시도는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파라다이스를 건설하자!” 그러나 특정 시점에 잠깐 좋아 보인 적은 있어도, 지속된 적은 없습니다. 세종대왕 때도 거지는 있었어요. 가장 발전하고, 인권이 보편화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마저, ‘돈’이 권력의 수단이 되어버렸습니다.

본문은 예수께서 등장하신 이래 선포하신 첫 설교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해요. 다른 복음서들을 통해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직후 세상에 등장하셔서 선포하신 첫 설교는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임을 알 수 있거든요. 그런데 14-15절을 통해 보면, 꽤 시간이 흐른 뒤인 본인의 고향인 ‘나사렛’에 와서 전하신 이 설교를 마치 예수님의 첫 설교처럼 말합니다. 의도가 있고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떠오릅니다. 이 누가복음의 수신자. ‘데오빌로’ 즉, 이방인이자 고위 관리로 세상의 지배자인 로마제국과 황제를 위해 사는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달하기 위한 의도가 아닐까요? 그리고 데오빌로는 우리와 굉장히 비슷합니다.

그런데 누가의 의도와는 별개로, 본문의 예수님도 의도가 다분하십니다. 대부분 회당 모임에서는 그 차순 안식일에 읽어야 할 본문이 정해져있고, 모인 사람들 가운데 가르칠만한 자가 그 본문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게 관례입니다. 그래서 이미 갈릴리에서 수많은 이적과 가르침으로 이미 스타로 칭송받던 예수께 메시지 전달을 청했습니다(15절).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17절). 관행을 사뿐히 지르밟고 읽어야 할 본문이 아닌 ‘이사야서’를 일부러 택하셨고, 그 긴 이사야서 중에서도 일부러 이 본문을 선택하신 것 같습니다(18-19절). 이사야서 61장 1-2절의 내용입니다. 61장 앞 내용들은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고발하고, 그 죄로 인해 망할 것이라고 판결하십니다. 하지만 이내 희망을 노래합니다. 그렇게 망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을 거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종’을 보내셔서 회복할 것을 예언하시는데, 61장은 바로 그 예언된 ‘하나님의 종’이 나타나,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질 것임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해방되고, 눈떠지고, 풀어주는 모든 것의 총합’이 ‘은혜의 해’라는 표현으로 귀결됩니다. 이는 두루뭉술하게 ‘좋은 날이 올 거야’라는 말이 아니라, ‘희년’이라는 법을 의미합니다. 이는 ‘매 50년마다 은혜의 해’ 즉, ‘희년’이 되면 ‘아무 조건 없이 종 된 자리에서 자유를 얻고, 저당 잡혔거나 팔려버린 가문의 땅을 아무 조건 없이 회복하는 것’입니다. 패자부활전을 넘어 ‘리셋’(Reset)이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있어서 가장 독특한 희년이라는 제도는 결국, 이스라엘은 인간의 권력으로 유지되는 다른 나라와 민족과 달리 하나님을 중심으로 누구나 회복되고 평안한 나라임을 드러내는 특별한 제도입니다. 훗날 이 역시 예언된 세상의 마지막 때, 종말에 완벽히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시제품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종말’을 무섭고 두려운 날로 그려내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종말은 모든 것의 최종 완성의 날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이 땅에서 구현될 수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하나님을 진정한 주인으로 모신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기록을 아무리 찾아봐도 실제 단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습니다. 맞습니다. 듣는 순간 ‘이게 가능하겠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누가 희년의 나팔이 울린다고 자기 소유를 내어놓겠습니까? ‘내가 수고해서 번 돈이고, 저 사람이 게을러서 빼앗긴 건데, 내가 왜 돌려줘야 해.’ 만약 그날이 온다면, 우리는 ‘은혜의 해’가 아니라, ‘불의의 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바로 이 말씀이 이루어졌고, 바로 자신이 그 ‘하나님의 종’으로 이루시는 주체, 이 ‘은혜의 해’를 이루시는 자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고, 이루어졌다는 이 엄청난 선언은 회당에 나올 정도의 신앙적 열심과 식견이 있는 유대인이라면 응당 무슨 말인지 이해했습니다. 다들 그 ‘메시아’를 기다리던 시대였고, 만약 어떤 사람이 이사야 61장을 인용한다면, 자동반사적으로 청중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의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다는 생각을 떠올립니다. 그렇다면 굉장히 기뻐해야 하잖아요. 그렇게 기도하고 기다리던 구원자 메시아가 눈앞에 나타나셨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화가 잔뜩 납니다.’(28절) 왜 그랬을까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그곳이 ‘나사렛’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는 ‘나사렛’이라는 마을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100여 년 전, 로마가 이스라엘을 정복하기 전의 이스라엘은 여호와 신앙을 내세운 유대인들의 ‘마카비 왕조’라는 독립국가를 유지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남유다가 멸망한 지 수백 년 만에 들어선 독립국가였지요. 이때 마카비왕조는 유대인과 여호와신앙을 강조하였고, 자신들이 지배하게 된 옛 북이스라엘의 영토에 남유다 출신의 경건한 이들을 이주시켰습니다. 그때 세워진 마을이 바로 ‘나사렛’입니다. 적진 한복판에 들어가는 건데, 얼마나 유대주의와 여호와 신앙에 투철한 사람들이 이주했겠습니까? 그리고 자신들을 통해 갈릴리지방이 하나님께 바쳐진다는 의미였으니 얼마나 가슴 뛰는 마음으로 이주했겠어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렸습니다. 마카비왕조가 100년밖에 못 가고, 로마에게 정복당한 것입니다.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버린 거죠. 북이스라엘 갈릴리 땅에 있지만 갈릴리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 유대순혈주의이자 가장 완고한 보수주의자들로 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기대는 단 하나였습니다. 바로 ‘메시아’가 오는 것. 그렇게 되면 이전에 무너진 유대왕국이 다시 세워지고, 온갖 고된 일은 이방인들이 하게 되고, 그들의 노동으로 자신들은 갑절의 몫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끼리만 잘 살게 된다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은혜의 해’가 우리에게만 은혜이고, 그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사렛인들이 원했던 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은혜의 해’가 아니라, 결국 지배를 위한 또 다른 권력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갈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은혜가 아니라 ‘심판’이 있어야 하고, 고난을 겪으며 버틴 자기들에게는 적절한 보상이 주어져야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복음이 아니라 ‘종교’입니다. 자기 욕망이 투영된 신앙. 얼마나 조잡하고 비루합니까? 신의 이름을 빌려와 자신들은 경건한 척, 죄인이 아닌척 하며 고결하게 살지만 결국 자신들의 제국으로 만들어 지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처럼 능력으론 안 되니까 신에게 갈구한 것이지요. 나아가 종교적 계율을 지켜준 것을 조건 삼아 하나님께 생떼 쓰는 형국입니다. “우리는 제사했고, 십일조도 냈고, 율법도 지켰으니 그 대가로 지배권을 넘겨주십시오. 우리도 좀 다스려볼게요.” 도대체 뭘 지켰습니까? ‘은혜의 해’는 한 번도 못 지켰으면서 말입니다. 가만 보면 지킬 수 있을 법한 것만 지키고, 안 되는 건 원래 못 지키는 것이라고 둘러대죠. 많이 해본 말이죠?

그런 면에서 차라리 로마가 낫습니다. ‘어차피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구에게 지배받을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면 내가 먼저 지배해버리겠다. 칼의 힘으로 평화를 이루겠다’는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니 말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이런 이방적 사고가 가득한 이들이 놀라운 하나님의 복음. 즉, 하나님 아래 은혜로 가득한 세상이 있다는 메시지를 더 잘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헬라인은 예수를 받아들였으나 유대인들은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결국 나사렛에서 쫓아냈고, 나중에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누구보다 잘 아셨습니다. 자신이 자라온 ‘나사렛’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사렛에서만큼은 기적을 베풀지 않고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사야 61장에 있는 ‘심판’, 즉 ‘우리 하나님이 복수하시는 날’이라는 표현을 빼고 읽으십니다. 자기들을 괴롭히던 이방인들을 심판한다는 내용을 일부러 빼신 겁니다. 심지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그것도 아무 가치 없는 과부이자 여인인 ‘사렙다의 과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그것도 자신들을 괴롭히고 지배했던 적국의 대장군, 마지 지금의 로마제국의 관리 데오빌로 같은 ‘나아만’, 자신들을 괴롭혔던 이방인들이 훨씬 선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흥분한 것입니다. 28절을 보면 “이 말씀을 듣고서, 모두 화가 잔뜩 났다”고 말합니다. 신명기에 의하면 거짓 선지자는 처형할 수 있었거든요.

그들이 예수님을 밀어낸 보다 본능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분명히 감탄하고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지막 말이 중요합니다. “요셉의 아들 아닌가?” 이 말에 예수께서 급격히 태세를 전환합니다. 우리도 늘 이런 말을 합니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라도 헤롯왕의 아들이나 대제사장 가야바의 아들에겐 권위를 줍니다. 그러나 ‘요셉의 아들’ 혹은 ‘나사렛 출신’에게는 권위를 주지 않아요. 예루살렘 히브리대학 출신에겐 권위를 줘도 목수에겐 권위를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렇게 우열을 나누고, 나보다 열등한 존재의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는 말의 의미를 간파하신 예수께서는 대놓고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말인즉슨, 도무지 나에게서 권위를 찾을 수 없으니, ‘기적’이라도 보여주면 권위를 주겠다. 나보다 더 나은 자라는 것을 증명하면 듣겠다는 말 아닌가?”(23절)

하지만 나사렛인들과 달리, 누가의 복음서를 전달받은 ‘데오빌로’에겐 이 복음 그 자체로 충격이었을 겁니다. 그가 살던 시기는 로마제국 역사상, 아니 세계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안정적인 제국의 시기였습니다. 그 유명한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에 의한 평화가 제창되던 시기이죠.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일부만 만족했을 뿐이었습니다. 결국 다수의 피정복민들의 행복을 빼앗아 세워진 행복이고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윤리적이었든, 인간성이든, 영혼에서 비롯된 내면의 울림이든 혹은 부끄러움을 아는 인생이라면 직감했을 겁니다. ‘뭔가 잘못되었구나. 이 로마에 은혜는 없고, 더 확장하여 빼앗아야만 평화가 유지되고, 절대자 로마황제의 곁에 가기 위한 신물 나는 권력투쟁으로 보상받는 제국이구나.’

또 이 로마를 지탱하는 로마의 종교는 어떠합니까? 로마의 신들은 어떻게든 인간과 위계를 나누어 지배하려는 신이고, 자기 초능력을 자랑하는 신이며, 심지어 인간과 권력투쟁을 하는 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요? 힘과 권력, 지배와 보상으로 운영되는 ‘로마의 평화’와는 정반대인 ‘은혜의 해’를 이루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충격 그 자체에요.

게다가 예수께서 선언하십니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21절) 즉, 본인이 ‘하나님의 종’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바로 그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신이 인간으로 오시다니요? 영광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해방과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라니요? 우리를 대신해 시험을 받으시고, 우리를 위해서라면 굴욕과 죽음마저 감당하는 신이라니요?” 그게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자신이 숨 쉬는 그 순간에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 선언은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합니다. “이루어졌다”라고 현재완료형으로 쓰였습니다. 방금 전 이루어진 이 일이 현재에도, 앞으로도 계속해서 영향을 미친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적 개념에서 ‘듣다’는 청각정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동의하고 살아내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이 말씀을 정말 믿는다면 “그때 이루어졌었다!”가 아니라 우리의 일생 동안, 영원히 이루어졌고, 이루어지고 있고, 이루어질 것입니다. 게다가 ‘오늘’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내가 속한 지금 시간이 포함된 24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맥상 ‘지금’이라는 뜻입니다. 즉, 정말 믿는다면 늘 매순간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 자리에 있었던 2,000년 전의 나사렛인만이 아니라, 그로부터 수십 년 후 로마제국 한복판에서 활자로 보고 있는 데오빌로와 시공간을 초월하여 지금 여기에도 이루어지고, 매 순간, 매 시점, 우리를 구속하여 포로하려는 그 무엇으로부터도 억눌리지 않으며 자유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역사가 일어나길 소원합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기쁜 소식을 듣는 이는 의외의 인물들입니다. ‘가난한 자’는 원어적 용례 상 물질적 결핍보다는 ‘겸비하고 경건하여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라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 즉, 뒤에 연이어 나오는 ‘포로 된 사람들’, ‘눈 먼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과 의미상 같은 말입니다(18-19절). 이런 의미가 앞으로 나올 팔복에서 언급되는데, 누가복음에서는 6장 20절에서는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사렙다 과부’, ‘나아만 장군’이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좌절하고, 이 세상의 악을 확인하고, 삶의 처절함을 직면한 자들. 모든 수단을 다 사용해도 안 되는 자들. 살만하지 않은 자들. 삼성을 다니든 공장을 다니든, 남자든 여자든, 모태신앙이든 오늘 처음 믿었든, 윤리적으로 살았든 별짓 다하면서 살았든 관계가 없습니다. 자신이 지닌 조건, 자신을 가리키는 수식어들은 자기 삶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얻고 되고 싶은 것에 대한 강요 없이 하나님만 의존하는 그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살 수 없음을 고백하는 자가 바로 은혜의 해를 지금 그리고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정말 재미있는 건 예수께서 뒤늦게 기적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30절 말씀의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를 보면, 일부러 “한가운데를 지나서”라고 힘주어 이야기합니다. 기적적 현상이었음을 명시하는 겁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닌 타인의 결핍을 채워주거나 메시지를 남기실 때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어쩌면 ‘나사렛’이라는 욕망의 현장으로부터 떠나는 그 자리에 하나님의 기적이 임한다는 메시지를 주고 계신 게 아닐까요? 네. 복음이란 것이 그렇습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에겐 기쁘지만, 안 받는 사람에게는 불편한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꺼내놓는데 때론 수치스럽죠.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과 세계관을 전복하고 부정해야하는데 불편할 겁니다.

‘은혜’라는 건 또 어떤가요? 우리 상식으론 이해가 안 됩니다. 나쁜 짓 한만큼 벌 받고, 열심히 한만큼 보상받는 것이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그래서 ‘화가 잔뜩 난 것’입니다. 또한 자신을 죽일 것 같은 절벽으로 몰고 가서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든 대적들을 위협합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그 돈과 관계, 내 욕망들을 어찌 내 힘으로 뚫어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그것이 우리를 죽이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과하지 마세요. 그를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기로 결단한다면 도무지 내 힘으로 끊어낼 수 없을 것 같은 그 자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내 의지가 아니라, 기적의 영역입니다.

데오빌로에게 고작 피지배인들인 유대인들의 종교가 무슨 매력이 있겠습니까. 내가 더 잘 사는데. 기복적 신은 매력이 없습니다. 그런 건 오히려 로마에 더 많아요. 그런데 세상을 지배하는 로마제국에 살고 있으나 그들의 문법에 구속당하지 않는, 남들은 더 얻고 지배하고 아귀다툼할 때 그것에 연연해하지 않는, 심지어 인간이 넘을 수 없는 마지막 한계인 죽음에마저 구속당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매력적입니다. 분명 함께하는데 전혀 다른 시공간을 살아가는 것 같은 그들의 자유함에 매력을 느낀 것이겠지요.

여러분, 우리는 진정 은혜의 해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정말 그 은혜의 해를 현재형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시간은 어떤 시공간에 있나요? “너 따위가 뭔데?”라는 말은 결국 우리네 세상을 지배하는 문법입니다. 끊임없이 우열을 나누고 가치를 판단해야 더 효율적이니까요. 그렇게 지배하는 게 본능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해를 살아가는 자는 이 세상의 문법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런 문법을 타인에게 구사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그걸로 평가받지 않고, 실수할 수는 있지만 부역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은혜의 해를 살아갑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풀어주고 해방합니다. 은혜의 해가 나에게, 우리에게, 교회에, 우리의 터전에 현재형으로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손성찬 목사(이음숲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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