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5장 1-11절

“…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이번 정부에 대하여 사람들이 기대했던 이슈는 부동산 문제 해결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부의 열심을 비웃듯 여전히 집값은 솟아오르고 있어요. 다면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정부예측을 넘어서는 사람들의 욕망이 얽혀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그 욕망의 집합체이자 대표적인 랜드마크가 ‘강남’입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강남’이라는 곳은 단순히 지역 명을 넘어 모든 이들의 소망이자 로망, 한국 사회를 압축한 엑기스 같아요. 고작 뽕밭이었던 곳이 최단기간에 별천지가 되어버린 곳, 가장 비싼 집값, 최고의 세련됨과 지적수준, 그리고 돈이 몰려있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곳은 서울시 인구의 폭발적 확장 앞에 우연히 선택받은 지역이었을 뿐인데, 거기가 별천지가 되어버렸습니다. 평당 1억 원이 넘는 아파트, 강남역 인근 평균 시세가 평당 4천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대소변이 마려우면 강남역 화장실을 사용합시다. 그런 호사라도 누려봐야지요.

사회적 풍자가 섞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남이 실제로 나쁘고, 못된 사람들만 모여 있는 복마전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제게는 한 때 ‘강남’이라는 곳에 대한 뭔가 모를 위화감이 있었습니다. 강남출신이라고 하면 뭔가 꺼리고, 어려워하고, 어쩌다 가면 주눅 들고.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는 아마 ‘나도 강남에 살고 싶다’는 또 다른 욕구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작 난 그렇게 못하니 위화감을 느낀 건 아닐까요? 정말 자유한 사람은 관심도 없고, 개의치도 않거든요.

‘강남’은 누구에게나 있는 성공과 출세에 대한 욕망을 대변하는 표현일 뿐이지 거기에 산다고 다 욕망에 차있거나, 또 살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욕망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소수의 강남 사는 사람과 다수의 강남 살고 싶은 사람들로 뒤덮인 게 우리네 현실 아닐까 싶습니다. 뉴스에서 집값이 평당 1억 원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면 짜증나고 집값이 너무 올랐다고 쯧쯧 혀끝을 차지만, 그래도 내 집값은 올랐으면 하잖아요. 이런 욕망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서양에도 있고, 인류의 역사 속에도 늘 등장했습니다. 그러니 기대감과 아이러니함에 대해 뭐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시몬’이 등장합니다. 훗날 예수께서 붙이신 별명 ‘베드로’가 익숙하기에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베드로’라고 하면 뭐가 떠오를까요? 먼저 한 가지 우리의 이해를 수정해야할 요소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흔히 알듯, 못 배우고 비천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게네사렛’ 호수. 일명 갈릴리 호수라고 불리는 곳에서 그물질하는 ‘어부’는 우리가 생각하듯 삶이 빠듯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일용직 노동자들로 가득 찬 갈릴리 지방에서 먹고 살만했어요. 게다가, 본문 ‘배’라든가 ‘그물’이라는 표현이 우리에게는 일반명사이지만, 우리가 좀 큰 배는 ‘선박’이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원어적으로 보면 특정 크기의 배나 그물을 지칭합니다.

그래서 추정해보면 당시에 이처럼 자기 소유의 배가 있고, 동업이 가능하고, 품삯을 받는 일꾼을 부릴 정도이고, 두 개의 배로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는 기술을 활용하는 이는 어부들 중에서도 상위층에 속하는 어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 정도이면 어업과 관련된 가공 및 유통사업까지 했을 가능성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본문의 배경이 되는 ‘가버나움’에 가보면 지금도 베드로의 집터가 남아있습니다. 재미있는 건, 2층집 여기 있는 누구의 집보다 넓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회당에서 굉장히 가까운데 위치했는데, 이는 그 마을에서 베드로의 위신과 부유함의 정도를 가늠해볼 수 있는 단서입니다. 그 마을에서 콧방귀 좀 뀔만한 사람이었고, 회당에 자주 가는 일종의 ‘배운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어업종사자 베드로가 거주하는 ‘가버나움’은 아내의 고향으로서, 현재 베드로는 아내, 자녀들과 함께 장모님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입체적으로 보기 위해 그 당시 갈릴리 지역을 살펴보겠습니다. 당시는 가버나움에서 멀지않은 곳에 두 개의 신도시가 개발되었습니다. 로마제국과 헤롯의 주도하에 가까이는 갈릴리 호수 변에 ‘디베랴’라고 음역되는 ‘티베리아스’, 그로부터 조금 더 내륙으로 들어가면 ‘세포리스’라는 곳이었습니다. 갈릴리 주변의 다른 곳처럼 낙후된 촌동네가 아니라 번화하고 발전하여 심지어 예루살렘 따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최신식의 로마식 도시가 건립된 것입니다. 마치 ’강남’처럼.

이런 시공간을 살아가는 베드로에게 있어서 삶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한 가지, 제가 아빠이자 남편으로서 조금 공감되는 것은 뼈 빠지게 일해서 돈 많이 버는 겁니다. 그리고 가족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만약 제가 베드로였다면 분명 단기간의 목표는 매일의 만선이었을 겁니다. 때문에 지금으로도 충분히 살만하지만 더 큰 부자가 되는 것, 그렇게 부를 축적하여 교육, 의료, 안전 등에서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것, 특별히 호수 주변 도시인 ‘티베리아스’로 이주하고 싶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강남 입성을 꿈꾸는 베드로라는 어부의 삶은 이렇습니다. 밤에 물고기를 잡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잘 잡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호수의 물고기들이 낮에는 바위 아래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갈릴리 언저리에 있는 지류 쪽으로 몰려들어요. 산소가 풍부한 물이 유입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통 새벽 5시까지 그물을 던지고, 5시 30분부터 7시까지 어구 손질 및 정리한 후에 퇴근하여 쉬고, 오후에 일어나는 것이 일상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밤새도록 정말 ‘아무것도’ 잡지 못한 겁니다. 베드로는 잡부가 아니라 직원들이 있는 사장이기에 ‘에이 못 잡을 수도 있지’라는 단순한 생각과 달리 훨씬 더 비참함을 느끼는 일일수도 있어요. 두려움과 심한 패배감에 사로잡힐 정도로 안 되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도 평소처럼 어구를 손질하고 있었던 베드로 앞에 예수께서 등장하십니다.

이미 우주대스타가 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적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밀려와’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진정시키시려고(1절), 사람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지만 그 외에 물 위에 서면 높아지는 확성효과를 위해 베드로의 배 위에 오르십니다. 그렇게 베드로는 배를 빌려드리고, 또한 예수께서 메시지를 전하시는 동안 배가 흔들리지 않게 제어하는 역할을 감당합니다(2-3절). ‘왜 이렇게 잘해주지?’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4장 38-49절에서 이미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준 전력이 있었고, 그 마을사람들을 치유해주신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호의는 무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일 가까운데서 그분의 가르침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마치신 예수께서 뚝배기 깨는 소리를 던지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4절)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직업군이 있습니다. 바로 ‘목수’와 ‘어부’입니다. 팔뚝이 크고 험한 성격으로 수틀리면 바로 연장 꺼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 목수가 어부한테, 어부의 구역인 배 안에서 도발합니다. 베테랑 어부 앞에서, 가뜩이나 아무것도 잡지 못해 어이없어하는 베드로에게, 그물질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이 자신의 상식과 문법 권위와 정반대의 무리하고 어이없는 요구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 어떤 마음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말씀을 따라”(5절) 시행합니다. 물론 여기에 너무 큰 의미부여는 하지는 않겠습니다. 이를 두고 순종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책임전가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우리 장모도 고쳐주셨고, 우리 마을 사람들도 고쳐주셨으니, 일단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 정도입니다.

베드로가 어떤 마음으로 그 말씀을 따랐는지는 전혀 상관없이, 말도 안 되는 결과가 벌어졌습니다.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7절) 이 압도적인 결과 앞에 베드로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나에게서 떠나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8절) 이러한 반응도 독자들에겐 당황스럽습니다. 본래 유대전통에 있어서 신적 존재를 대면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뜬금없이 자신을 ‘죄인’이라며 떠나달라고 한 것은 갑자기 없던 자기성찰이 생기거나 혹은 과거에 지었던 율법적인, 윤리적인 의미에서의 범죄들이 생각나서라기보다는 먼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살기 위한 부르짖음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경험과 기술과 살아온 문법을 정면으로 압살해버리는, 압도적이고 비정상적인 광경 앞에 서면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그릇으로 담을 수 없는 초월적이고 이질적인 존재 앞에서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두려움에서 비롯된 밀어냄이라는 것이 더 적절한 설명일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익숙했던 삶의 방식, 문화, 직업, 관계, 내 인생의 목적을 건드리지 말고 사라져다오.” ‘죄인’이 핵심이 아니라, “받아들일 수 없으니 내 앞에서 사라져다오.”

그런데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10절) 지난주 설교를 듣고 누군가 물었습니다. ‘희년’과 그것을 설명하면서 언급한 ‘은혜의 원리’가 이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쁘고 게으르게 살았던 사람도 동일한 대가를 받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억울하고 비합리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람은 당연히 ‘보상의 원리’에 익숙하고 그게 합리적이고 정의롭다고 생각합니다. ‘권선징악(勸善懲惡)’, 착한 사람은 상 받고 나쁜 사람은 벌 받고, 성실한 사람이 더 받고, 게으른 사람은 덜 받는 것이 공평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이런 원리가 정말 정의롭게 구현된 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실제는 나쁜 사람이 더 잘 살고, 착한 사람은 못 삽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짜증나는 겁니다. 때로는 사람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갑자기 닥친 사고나 재해 앞에 고통 받기도 합니다. 또 성실히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잘살기보다, 부모 잘 만나서 잘 먹고 잘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분명히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보상의 원리’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기대하는 우리 모습이 얼마나 아이러니합니까?

사실 정말 은혜 가운데 산다면 타인과 비교하기보다 오히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큽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보상’의 기준 아래 판단하니 비합리적이고 짜증나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논리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복음을 만날 때 위화감과 심지어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것이 당연합니다. 한편으로 예수를 믿는데 두려움을 느낀 적 없다면 그것도 이상한 겁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가장 많이 부여하신 명령어가 바로 “두려워하지 말아라”입니다. 여러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것이 주님 말씀입니다.

삶의 새로운 문법을, 그리고 새로운 목적을 부여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협소하게는 베드로 개인에게 부여된 사도로서의 소명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좀 더 넓게 보면 예수를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엄마야 누나야 강남 살자’로 귀결되는 기존의 문법으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삶의 목적.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타인’을 위해,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새로이 규정된 삶과 목적 앞에 베드로와 그 형제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갔다.”(11절) 여기에서 ‘모든 것’은 단지 눈에 보이는 재화나 사람을 넘어, 기존의 삶의 문법과 목적까지 포함하는 전인격적인 내려놓음입니다. 그렇게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여러분, 저는 이 본문이 단지 그 유명한 ‘베드로’가 어떻게 첫 번째 제자가 되었는지에 대해 단편적인 정보를 전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 공적 사역을 시작하신 이래로 처음 조우하신 ‘개인’입니다. 제가 아무리 하나님 나라라는 거대담론을 이야기해도 결국은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지에 대해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 만남이기에 가장 처음으로 소개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예수를 만납니까? 예수께서 ‘시몬의 배’에 올라타십니다(3절). 예수께서 먼저 그를 찾아내셨고,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그리고 그가 예수를 만난 시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어부로서의 자신감, 즉 자기 인생을 부요케 하는 수단이 다 어그러져 인생의 목적마저 흔들리게 되는 그 철저한 실패 앞에서 조우합니다. 그리고 본문엔 없지만 개인적으로 중요한 것이 하나 생략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몬의 배’가 아닌 ‘시몬의 텅 빈 배’입니다. “밤새도록 애썼으나” 즉, 내 능력, 내 힘, 내 방법대로 최선을 다해 노력했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한 그 허무하고 허탈한 곳이 시몬의 텅 빈 배입니다. 우리는 이럴 때 갑자기 생각을 하기 시작하고, 소크라테스가 되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과연 내가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사는가?’라고 고뇌하는 그 지점 앞에 예수를 만나게 되었어요. 네. 아이러니하지만, 비어있었기에 만날 수 있었습니다. 비어있었기 때문에 입이 벌어질 만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할 만큼 채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여전히 내 수단과 방법과 내 의지와 욕망으로 채워져 있다면 채움 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좀 살만하다 싶다면, 채움을 받을 수 없어요. 비워졌을 때 채워집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갔다”라는 말이 마음에 좀 걸립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두려움의 근원일 수 있습니다. 기존의 문법과 기존에 내가 그리 사랑했던 대상보다, 기존에 나를 풍성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의존했던 그것보다, 예수가 더 매력적이지 않다면 아무리 앞에서 떠들어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간 시몬’이 아니라, 정말 모든 것을 버리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시몬보다 예수께서 먼저 모든 것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늘영광 다 버리시고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1절을 보면 무리가 예수께 밀려옵니다. 그를 절대자로 추종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그런데 자기 좋다는 모든 무리들을 버려두고 그 한 사람, 고작 티베리우스를 지향하던 그 한 사람 ‘시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제일 큰 관심은 ‘모든 것을 버려둘지라도’ 바로 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장모를 치유하고, 마을 사람들을 치유하는 기적을 경험한 후 자기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을 베드로는 “선생님”이라 부릅니다(5절). 이는 일반적으로 ‘랍비’를 부를 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그리고 자기 배 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 권위를 내어드렸어요. 그러나 종국에 어떻게 외칩니까? “주님!” 무릎을 꿇는 행동언어를 통해 그의 진심이 전달됩니다(8절).

여러분, 인생에 있어서 ‘선생님’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가 내 인생을 바꿔주지는 못합니다. 능력이 없어서일 수도 있지만, 사실 우리가 그만큼 권위를 내어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에 조금만 격하게 들어오면 더 이상 선생님이 아니라, 꼰대로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 즉 나의 주인 되신 분은 내 인생을 바꾸어놓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권위를 내어드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우리가 권위를 내드린 주인님이 얼마나 많습니까? 티베리우스를 지향하며 살아가는 근원인 ‘돈’도 주님, 애지중지 돈을 벌어들이는 도구인 ‘배’도 주님, 통치자 ‘헤롯왕과 로마 황제’도 주님, 자신의 구원을 담지 한다고 느껴지는 ‘회당’조차 주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 내 문법 안에 있는 것들이자, 궁극적으로 나를 채워주는 것이 아닌 늘 모자라고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입니다. 오직, 내 인생과 내 영원을 가득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예수’이십니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 세상마저 가득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를 따르는 것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합니다.

인생에 의미가 없고 목적이 없습니까? 믿지 않는 이들이라면 ‘선생님’은 많으나 ‘주님’이 없기 때문이고, 때로는 ‘주님’이 너무 많아 잘못된 오더들 속에 방황하기 때문일 겁니다. 반대로 믿는다고 하지만, 그래서 정말 그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특정하지만, ‘선생님’ 정도로 바라보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느새 그리스도인이라는 옷을 입고도 예수를 따르는 자리가 아니라, 어부의 삶으로 예수 이전의 삶의 문법을 따르려고 해서는 아닐까요?

모든 것을 버려둔 줄 알았지만 ‘티베리우스’에 살기 위해, 오늘의 더 많은 어획량과 배의 주인이 되기 위해 살고 있는 겁니다. 그뿐 아니라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는 새로운 삶의 이정표를 무시하고, ‘사람’을 무시하고, 텅 빈 배만 주구장창 의지하며, 쳐다보고, 그 앞에서 한숨만 쉬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사람은 변함없이 항상 똑같은 지점에서 넘어집니다. 가만 보면 항상 같은 자리로 되돌아갑니다. 그게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다시 돌아갈 곳은 처음이라고 합니다. 처음 만난 곳, 그때 내가 짊어지고 있던 것, 계속 제자리로 돌아기에 거기를 봐야하고, 그때 예수께서 나를 만나주셨기에 바로 거기에 답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건 시작일 뿐입니다. 9장 20절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어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주님’이라고 고백하지만,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정체에 대해 앎과 확신이 부족했어요. 그런데 9장에서 예수가 바로 구약에서 예언된 그 ‘메시아’ 즉, ‘그리스도’임을 확인하고, 이를 인류 최초로 고백하는 엄청난 훈장을 남기게 됩니다. 여러분 지금에 머무르지 말고 더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더 풍성하고 넓고 크신지 하나님에 대해 배워야 합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정말 사람답게 계속 헛일을 합니다. 가장 큰 사건이 뭡니까? 훗날 욕을 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사건입니다. 성경은 이를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사도행전’에서는 그는 가장 담대한 복음전도자, 즉 사람 낚는 어부로서 활동한 기록이 나옵니다. 이 모든 결과와 여정의 시발점은 단지 예수께서 다가오셨고, 부르셨고, 두려워하지 말라 말씀하실 때 그것을 받아들인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면 됩니다. 엄청난 신앙고백이나 큰일이 아니라 권위를 나로부터 그분께 드리는 ‘주님’이라는 고백과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간다’는 그것. 단지 그것으로 주님께서 나를 의인으로 칭하시고, 은혜로 대하시고, 끝까지 이끌어 가시며 삶이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손성찬 목사(이음숲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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