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5장 27-32절

“…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신과 함께’라는 유명한 웹툰을 기반으로 한 영화가 대히트를 쳤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건 ‘나태지옥’인데, 구르는 밀대를 피해 계속 도망가야 하는 그 장면이 압권이었습니다. 이승에서는 벌을 받지 않아도 사후에는 벌을 받을 수밖에 없고, 반대로 이승에서는 별 볼 일 없는 자였어도 그 선한 양심에 비추어 ‘귀인’으로 추대될 수 있다는 ‘권선징악’의 구도를 분명히 그리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바라는 만큼 권선징악이라는 게, 이 땅에서 그것이 온전히 구현된 적도 없고 구현될 수도 없지만, 저 세상에서라도 그것이 온전히 실현된다는 것은 그래도 사람에게 희망을 줍니다. 1편의 차태현 씨가 연기한 소방관 ‘김자홍’은 19년 만에 나타난 귀인이라고 소개되었는데, 그런 특별한 사람치고 너무 귀하지 않습니다. 착하긴 하지만 특별한 선행이 없고, 소소한 뻘짓들을 합니다. 즉, 귀인이긴 한데 우리 눈에 크게 귀인답지가 않은 겁니다. 심지어 모친을 살해하려고 해요. 게다가 2편은 더 황당합니다. 김자홍의 동생 김수홍은 억울한 죽임을 당한 군인인데, 1편에서 악귀가 되어 수많은 사람을 헤치려 들었던 자가 갑자기 ‘귀인’의 자리에 올라갑니다. 말도 안 되는 귀인 등극에 설득력이 너무 떨어져서 몰입이 안 됐다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간디나 마더 테레사 같은 인물이 아닌 한,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귀인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영화가 종교적 세계관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네 기독교 신앙과 비교해 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중에 하나였습니다. 제게 가장 큰 맹점으로 비춰진 것은 저승에 떨어졌을 때부터 ‘귀인’ 명패를 달고 나타났는데도, 그것을 변호하고 증명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 모순처럼 느껴졌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모순된 점은 2편에서 ‘김수홍’이 이렇게 귀인이 되면 뭐가 좋은 거냐고 묻자? 그를 인도하고 변호하던 차사가 ‘환생’이라고 답합니다. 그래서 김수홍이 말합니다. “난 환생하고 싶지 않다고. 사는 게 지옥인데, 뭐 하러 그 지옥을 다시 사냐”라고 말입니다. 참 복합적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사실 우리는 다 압니다. 자신이 귀인이라 불리기에 얼마나 열악한 존재인지. 그래서 때로는 자기합리화를 얼마나 잘하는지 말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그러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네가 왜 그랬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는 징벌이 아니라, 그 동기에 대한 고백을 통해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여자가 줘서 먹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타인 때문이었다고 하는 자기합리화와 그래도 타인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그를 밟고 자신을 나아보이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질문을 이어받은 여자 역시 “제 잘못입니다”가 아니라 “뱀이 꼬셔서 그랬습니다”로 응수합니다. 그 결과는 어떠합니까? 자기 의를 변호하며 잠깐의 정신승리에서 비롯된 만족감. 그러나 서로 의심하고 떠넘기는 악순환의 굴레 속에 끝도 없이 공허하고 불안합니다. 이런 행태는 인류역사를 통해 지금까지 반복되어 왔습니다. 이를 가리켜 ‘희생양 만들기’라고 합니다. 내가 더 나아 보이려고, 우리가 더 나아 보이려고 만드는 희생양.

오늘 본문에는 사람들이 규정한 죄인 중의 괴수가 등장합니다. ‘레위라는 세리’ 당시 로마제국은 제국 내 지배민족의 세수를 위해 각 지방에 일반 세금을 걷는 세금 공무원을 두었습니다. 동시에 그 외의 기타 세금을 걷기 위해 현지의 피지배 민족 중 민간 하청업자, 즉 세금 청부업자들을 선발해서 ‘세리’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이 선발되는 기준은 일종의 경매입니다. 지역관리가 최고 징수액을 부르는 세금 청부업자에게 미리 선급을 받고 징수권을 건네주면, 세리들이 자유로이 징수하여 선납금 주었던 부분을 채우고, 나머지를 자기 이익으로 챙기는 겁니다. 이건 로마가 대놓고 부정부패를 용인해 준 것이고, 여기서 선발된 사람은 대놓고 부정부패를 일삼거나 시민들을 괴롭히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대에 ‘세리’라고 하면 세상에서 박멸되어야 할 가장 나쁜 사람을 지칭하는 대명사이자, 일반적으로 욕설로 쓰이는 관용구였습니다.

‘레위’는 그렇게 세금을 거두는 통행 관문이 있는 마을 가버나움의 세관 ‘세리’였습니다. ‘레위’라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그는 레위지파 즉 다른 모든 경제활동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성전과 그 제반 업무를 위해 선별되어 그 일만 하던 부족 출신입니다. ‘레위’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다’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로마만이 나의 기업이므로, 로마에게만 봉사하겠다’ 아니 노골적으로 ‘돈만이 나의 기업이므로, 돈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름의 역설이 더 큰 경멸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크지 않은 마을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예수에 대한 놀라운 소문이 들린 것입니다. 5장 전반부에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오셔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고, 랍비들이 제자를 선발하는 관행을 전격적으로 뒤집으셨을 뿐만 아니라 어부 베드로와 그 형제들을 제자로 부르신 사건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12-13절에서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는 부정한 자입니다. 여기서 ‘부정하다’는 뜻은 ‘일시적으로 정상이 아닌 상태’를 지칭하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사람 자체가 부정한 존재’라는 의미로 변질되었습니다. 게다가 나병환자를 만지면 만진 자도 부정해진다는 법이 있었는데, 이것 역시 확증 편향되어서 ‘나병환자를 만진 자도 죄인이 된다’라고 여기며 기피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를 직접 만지시고 치유해주신 겁니다. 어쩌면 부정한 자에게 손을 대시며 치유하시고 부정함을 떨쳐내는 이 지점에서 레위는 그 누구도 보지 못한 빛을 보았을 겁니다. 부정하다고 사람들이 기피하는 나병환자. 비록 자신의 몸도 건강하고 돈도 많았지만 마음에 질병이 있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나병환자보다 더 기피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17-26절의 ‘중풍병자’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 병자가 언제부터 병을 앓았는지, 왜 그런지 누구도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사람들은 그 ‘중풍병’이라는 결과를 보고,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벌을 받았다고 수군거렸어요. 사실 유대인뿐만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편만한 ‘권선징악의 기대감’과 ‘종교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 고통 받는 이유를 알고 싶어 하고, 잘 모르겠으면 어떻게든 만들어냅니다. 그러기에 가장 손쉬운 게 ‘신’입니다. ‘뭔가 죄 지은 게 있어서 신으로부터 벌 받은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를 외면하거나 병에 걸린 이유 역시 묻지 않으시고 치유하시며, 오히려 공개적으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눅 5:19-20)

공인된 마귀의 자식 레위는 이 지점에서 희망을 보았을 겁니다. 다만, 경멸당하는 존재로서 대중들과 섞일 수 없었기에 또한 부정한 자신의 죄가 예수께 전가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예수께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를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27절) 레위는 이렇게 반응합니다. 베드로처럼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갔습니다.”(28절) 이렇게 즉시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라간 것을 보면, 아마 처절한 내적투쟁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동안 돈을 좇아 양심을 버리고 관계를 버리고 살았으나 그렇게 얻은 돈이 자신의 행복을 장담하지 못했고, 오히려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 앞에 좌절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의 경멸은 참을 수 있었으나 ‘이렇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구나’라는 영혼의 울림이 있었던 게 아닐까요?

이어서 예수께서는 레위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그리고 그의 ‘동료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십니다. 당시 문화로 함께 식사한 다는 것은 ‘우리가 급이 같다’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만약 죄인과 식탁교제를 했다면 그 사람은 동일한 죄인이라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장 최악으로 규정한 ‘세리’와는 정반대의 인물들 즉, 사람들이 규정한 최고의 의인 ‘바리새파 사람들과 그들의 율법학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30절) 그러자 예수께서 희대의 명언을 말씀하십니다. 31-32절에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입니다.

‘골든타임’이라는 드라마의 한 장면 중에 중범죄자를 쫓던 경찰이 총을 쏜 후, 그만 낙상했습니다. 범죄자는 총상으로, 경찰은 낙상으로 응급실로 실려옵니다. 하필 수술 방이 부족합니다. 이 환자들을 맞이한 두 명의 인턴은 서로 다툽니다. 둘 다 당장 수술이 필요한데 누구를 먼저 수술하느냐? 보다 더 위급한 범죄자인가? 아니면 의로운 경찰인가? 설왕설래하던 중, 담당 의사가 뒤늦게 와 두 사람의 상태를 체크하고는 아무렇지 않게, 범죄자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먼저 수술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경찰 우선을 주장했던 인턴이 분노하며 어떻게 범죄자를 먼저 수술하느냐고 따집니다. 그러자 의사가 대답합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OOO이지 범죄자가 아니야. 그리고 의사는 그 사람이 누군지를 보는 게 아니라, 병의 상태를 보는 자리이다!’

진정한 의사는 환자가 지닌 조건이 아니라, 그의 병세의 위중함으로 치료합니다. 진정한 의사에게 모든 생명은 동일한 것입니다. 그래도 솔직히 좀 불편합니다. 언뜻 보면 어떻게 범죄자를 먼저 치료할 수 있냐는 외침에 정당성이 있어 보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패러다임 때문입니다. ‘바리새인파 사람들과 그들의 율법학자’들의 불평은 당연합니다. 어찌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사람이 자신들이 아니라, 그 죄인 중의 괴수들과 어울리는가? 그리고 주어진 율법을 잘 지키며 정말 “하나님만이 나의 기업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살았던 그들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리인 레위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오히려 ‘어떻게 죄인이랑?’이라는 의문 이전에 저라도 수모당하는 느낌이었을 겁니다.

그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아마 우리도 특히 여기 계신 분들이나 크게 모나지 않고 윤리적으로 사셨던 분들은 공감할 겁니다. “경찰을 먼저 치료해야지. 어찌 범죄자를.” 그렇게 우리는 본능적으로 ‘의사’로서의 치료가 아니라, 선과 악을 가르는 ‘판관’으로서의 역할을 더 우선적으로 기대하게 됩니다. 이렇게 먼저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인간 모두에게 있는 종교심이자 본능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하나님의 모습 즉, 선과 악을 가르는 판관이 아니라 치유가 목적인 ‘의사’임을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32절의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라는 말씀은 특별히 불평한 자들의 속마음에는 최소한 레위보다는 자신들이 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유대인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우리 역시 그러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한마디로 정리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의인을 구하시고 악인을 심판해야 한다고 징징대는데, 실상 하나님 보실 때 부를만한 의인은 없다’’라는 뜻이거든요. 사람들은 조금만 자기에게 유리하다 싶으면 하나님을 ‘판사’로 만들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판사가 아니십니다. 판결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판결하면 우리 모두 다 지옥에 갈 판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희생양 만들기’로부터 자유로운 분이 계십니까? 그 어떤 인간도 선과 악을 판단 받을 만큼 자격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켜 의인을 만들려고 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를 앞에 두고 이 말을 한다는 점이 참 재미있습니다. 이는 결국 ‘레위는 죄인이 맞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박애주의자가 말하듯 무조건 죄가 없다거나 그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으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징징대지 않아도, 주님은 판단을 회피하시지 않으십니다. 선과 악을 가르는 건 신의 준엄한 역할이기에 그 일은 종말 때에 하실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의사로서 치유하시는 것이 먼저인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이 사람은 이제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야.” 왜냐하면 “죄인을 불러” 즉, 죄인 중의 죄인 세리를 불렀는데, 이 죄인이 부름에 반응하였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레위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반응합니다. 클럽에서 열심히 놀다가 문득, 술에 절어 살다가 문득, 성적 일탈 앞에서 문득, 호구지책을 위해 불의를 잘 참다가 문득, 더 벌어보겠다고 눈코 뜰 새 없이 일하다가 문득…. 누가 말하지 않아도 문득문득 자기 병세를 확인하고 의사가 필요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개합니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갔다.”(28절) 이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개’의 참뜻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 내가 선택한 수단으로, 내가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허무한지 알기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하나님 중심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 레위는 정말 회개한 겁니다. 그는 그렇게 ‘의인’이 됩니다. 사람들이 인정한 의인이 아니요, 스스로 노력하여 죄를 다 씻어내고 의인이 된 것도 아니지만, 부르심에 반응하고 회개하자 예수께서 그를 의인으로 만드신 겁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주님께서 영화 신과 함께의 염라대왕이나 7개의 지옥을 관장하는 7명의 대왕처럼 끝도 없이 의심하며 시시비비를 가르는 판관이 아니라, ‘의사’로 다가오셨다는 사실에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누립니다. 이런 나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레위라 불리는 세리가 의인 되는 과정에 주목해보세요. 비록 내적투쟁이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죄를 양산해내는 세관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버나움으로 오신 것도, 레위를 찾아가신 것도, 그를 부르신 것도, 그를 데리고 떠나 함께하신 것도 예수님이십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어찌해야 자유해질 수 있을까 고민하고 온갖 종교와 철학, 사상과 심리 또는 소문에 의지하여 어쨌든 더 귀인다운 모습, 더 의인다운 모습, 더 가치 있는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모든 틀을 깨부수시고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사람들은 타인의 희생양으로 만들어서 자신의 고결성을 유지하려 하지만, 예수께서는 본인이 희생양이 되셨습니다. 죽어야 하는 희생양을 살아있는 양으로, 도살장에서 늘 푸른 초원으로 자유함을 주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진정 의사로 맞이한 자는 더 이상 죄인 중의 괴수가 아닌 것입니다. 본래 ‘레위라 불리는 세리’가 그의 정체성이었으나, 이제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를 믿읍시다. 의사이신 예수님을 믿읍시다. 그리고 정말 그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제 다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내가 갖고 있던, 혹은 사람들이 강제한 그런 기준을 해체하고 하나님의 기준을 따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기준을 부지런히 습득하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나아가 더 이상 자의적으로 ‘의인과 악인’을 나누었던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기독교인들이 흔히 쓰는 표현이 있어요.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않는다.’ 사실 이 말은 멋있어 보이기는 하나 어려운 말이에요.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을 감정과 분리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연 누가 죄인으로 지목된 사람, 심지어 자기 기준으로 죄인이라 판단한 사람에게서 죄와 감정을 불리할 수 있을까요? 감정은 그렇게 무 자르듯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고 미워하고 분노하면 결국은 속이 망가지게 됩니다. 또한 그렇게 불편한 감정이 생겨버리면 이미 온전한 사람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나쁜 놈으로 보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사랑합니까?

자, 지금까지 이야기를 통해 혹시 그 불평자들, ‘바리새파 사람들과 그들의 율법학자들’을 어느새 나쁜 놈으로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이것이 바로 ‘희생양 놀이’를 비판하는 설교를 들으면서 또 다른 ‘희생양 놀이’가 구현된다는 증거입니다. 또 자기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는 겁니다. 그래도 저 사람들보다는 자신이 더 낫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만약 그들이 지금 우리 옆에 있었다면 분명히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죄인으로 규정하는 건 사회적으로 합의된 법의 영역이고,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최선은 고작 타인을 쉽사리 죄인으로 보지 않는 것뿐입니다. 사람을 ‘세리’나 ‘죄인’으로 보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그러셨듯 사람을 사람으로 보려는 것입니다.

정리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수전노다! 부역자다! 가장 부정한 자다!”라며 ‘세리 레위’를 경멸당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다들 그렇게 살았습니다. 정말 먹고살기 힘든 최악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들 로마를 욕하면서 로마에서 발주한 공사에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면서 돈을 벌어먹고 살았습니다. 다들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악착같이 살았어요. 율법도 잘 지키지 못했어요. 반면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지 않았던 바리새인들을 의인이라 부르기에 합당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마음 한편에는 늘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안타까운 환경과 사회구조 속에서 대놓고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세리들은 그래서 분노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 세리를 통해 자신들의 부끄러움이 더 강렬하게 투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더 미워했고, 소수의 희생양을 통해 나머지 자신들의 정신건강을 지킬 수 있었기에 더 강렬하게 퍼붓는 겁니다.

이 내용은 누가복음뿐만 아니라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4복음서에 모두 쓰여 있습니다. 각 복음서를 받아보는 주 대상이 다르기 때문에, 각각 부각되는 주제가 다릅니다. 그중에서도 마태복음은 그 대상이 ‘유대인’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이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가 바로 지금 ‘레위라 불리던 세리’ 바로 이 사람입니다. 자신을 경멸하던 유대인에게 가장 큰 분노와 미움이 있을 것 같은 그 레위 마태가 다름 아닌 유대인들을 위한 복음서를 기록합니다. 예수를 따르다 보니 어느새 죄는 미워하되 정말 죄인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정말 예수와 함께 갑시다. 모두가 그 샬롬 가운데 거하길 바랍니다.

손성찬 목사(이음숲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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