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6장 1-5절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6일간 창조하시고 7일째 되는 날 쉼을 가지시며, 즉 안식하시며 인간을 향해 나도 쉬니 너희도 쉬라고 하셨다는 데서 비롯된 개념이자 훗날 십계명의 제 4계명에 명시된 날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본래 토요일인데 우리가 일요일 즉, ‘주일’을 떠올리며 가장 많이 연동하는 개념입니다. ‘안식일’과 관련해서 제가 굉장히 감명 받았던 유명한 명언이 있어요. 미르바 던(Marvq J. Dawn)의 『안식』이라는 책에 적힌 글입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게 아니라, 안식일이 우리를 지킨다.” 이 문구를 ‘주일’로 치환해서 음미하니, 감동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표현은 어디에나 가능하겠구나 싶습니다.

“내가 아내를 지킨 게 아니라, 아내가 나를 지켰다. 내가 아이를 키운 게 아니라, 아이가 나를 키웠다”

지난 주 5장에는 일련의 죄인들이라고 지칭되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나병환자, 중풍병자 이 모든 것을 쌈싸 먹어버릴 죄인계의 끝판 왕 세리 레위.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을 ‘죄인’이라 규정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돌려세우고, 그러한 기준을 제공한 율법 자체를 사람들의 통념과는 다르게 재해석해 버리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러 왔다.’ 이에 충격을 먹고 분노한 일종의 공인된 의인인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이단사상을 발본색원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지요.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이 바로 어느덧 대립관계로 설정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벌어진 2차 혈투, 즉, 일명 ‘안식일’ 논쟁을 그리고 있습니다.

유대교의 체계에서 ‘의인’이 되기 위한 가장 기초적 토대가 금식과 안식일 지키는 것인데, 특히 안식일은 거의 신성시되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과 관련하여 2연타 사건이 발생합니다. 노동하면 안 되는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비벼 먹습니다.(1절) 그건 나그네들에게 허용되는 지점에서 정당하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만 바리새인들의 공격은 금해진 노동, 즉, 추수행위를 한 것에 대한 공격이었습니다. 이어서 6절부터는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는 사건이 등장해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환자를 안식일에 회당 안에서 고쳐버리십니다. 이에 논쟁이 벌어집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현재의 유대교는 바리새인의 전통 가운데 서있고, 지금도 약 30%정도의 본토 유대인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내고 있어서 이런 논란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엘리베이터가 모든 층에 서기도 합니다. 누르는 행위를 금하기 위해서요. 그리고 안식일에 요리하지 못하기에, 그 전날 미리 다 해놓고 꺼내먹기만 합니다. 근데 급하게 불을 켜야 합니다. 그래서 옆집에 연락해서, 와서 켜달라고 요청했다는 경건한 유대인의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이없었지요.

벌써 십 수 년 전 얘기인데, 막 이스라엘에서 학위 받고 오신 교수님께서 말씀해주셨습니다. TV를 켰는데, 심야토론 같은 방송이 나오길래 어떤 주제를 두고 열띠게 토론 하는가 봤더니, “안식일에 유모차를 끌고 회당에 가는 게 노동을 한 것인가 아닌가?”라는 주제였습니다. 누가 봐도 비상식적이고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반응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9절) 여러분, 이거 대학교수들 모아놓고 발언하는 자리라고 여기시면 되는데, 그런 위엄 있는 자리치고, 논리구조나 표현이 굉장히 유치하지 않나요? 하지만 이 유치한 논리에도 그들은 대꾸할 수 없었습니다. 그 유치한 발언이 사람의 양심과 상식선에서 볼 때, 결코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들은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발언이 논리적이고 상식적으로는 맞지만, 자신들은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이 주신 법대로 특수한 사명을 가진 민족이자, 선별된 사람들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게 그들의 자세이자 세계관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별개라는 것이지요. 어쩌면 그들은 예수님의 발언을 이렇게 평했을지도 모릅니다. “너무 인간중심적이다.” 이거 이천년 뒤인 지금도, 교회에서 종종 듣는 이야기기인데, 신기합니다.

이것은 논리나 상식을 뛰어넘은 세계관과 해석의 대결이기에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 이 안식일 논쟁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왜 안식일에 추수행위를 하냐?’라는 그들의 공격 앞에, 너희들이 신화처럼 여기는 다윗 역시 구약에 보면, 안식일에 그러한 노동을 했다며, 성경을 통해 논리적으로 차분히 반박하신 후 하신 말이 중요합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5절) 그들이 어차피 안 들을 거니까 예수님 스스로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해석할 권리가 자신에게만 있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마치 죄인과 의인에 대한 해석을 다르게 선포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새로운 해석이 아니라 재해석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안식일이라는 율법을 선사하시며 노동을 금하신 이유는 자명합니다. 결국 탐욕이 과한 자들이나, 반대로 없는 자들이 강제적으로 쉼 없이 노동을 하게 되잖아요. 그래서 이 모든 노동을 멈추거나, 멈출 수 있게 배려하여 함께 쉬며, 하나님을 경배하고 영혼의 쉼을 갖게 하는 게 목적이셨습니다. 다만 2천년이 흐르는 동안 이를 문자 그대로 지키려다 보니, 하나님이 주신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자기들만의 해석체계로 지켜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도리어 이게 인간중심적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이 선언은 본인이 주인으로서 권리가 있기에, 처음 하나님께서 주셨던 그 법의 의미대로 돌려놓으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 해설이 뭔가요? 단순합니다. “선을 위한 날이고, 살리는 날이다.”(9절) 그래도 의문이 듭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안식일’에 나쁜 짓을 하고, 누군가를 죽인 것도 아니고, 열심으로 지키려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려는 이 노력은 다윗-솔로몬 왕국이후에 천 년 이래 가장 열심을 다하던 시기였는데, 격려는 못할망정, 모양 빠지게 자신의 권한까지 운운하시면서 예수님은 왜 이렇게 선언하셨을까요?

저는 이게 단지 ‘안식일’이라는 한 테마만을 지목한 말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리 레위를 둘러싼 논쟁도 결국 비슷한 맥락이었거든요. 그들은 지금 거룩한 열망에서 안식일을 지키고 수호한다기보다는, 자기만의 해석을 가지고 헛된 열심을 내고 있었고, 그 헛된 열심의 근원 역시, 실상은 하나님을 사모하고 경배하기 위함이 아니라, 실제 자신의 종교심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중심이라고 얘기하고 있지만 누구보다 인간중심적인 종교심을 드러내어 깨부수는 작업을 하고 계신 겁니다.

이 ‘종교심’에는 끊임없이 ‘성과 속’을 나누려고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의인과 악인을 나누려했던 것처럼요.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것은 안식일의 선하고 살리는 의미가 나머지 6일에 투영되길 원하셨던 것이지, 안식일만 특별히 부각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안의 종교심은 오히려 성과 속을 나누려 들어요. 나머지 6일과 구별되고 거룩한 하루를 분리해놓는 것입니다.

이런 성속의 원리를 가장 강렬하게 발산하는 종교 중 하나가 유대교입니다. 하지만 이런 ‘종교심’에 기반을 둔 성과 속을 나누는 습성은 꼭 종교에서만 발현되는 게 아닙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무신론자에게도 나타납니다. 일종의 무신론자들의 종교이자, 이 시대의 종교라 부를 수 있는 ‘과학’에서요. 과학을 종교적 심성으로 대하는 이들은 과학적 합리성이 부여되지 않은 것을, 마치 종교에서 속된 것을 바라보듯 바라보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종교적인 이야기를 하면 속된 것으로 바라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믿기에 그리스도의 해석대로 살아간다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가요? 예를 들어볼까요? 마치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부르면서, 교회와 세상을 구분 짓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우선 십일조를 하나?, 안 하나?”라는 말은 지금 의미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건 나중에 본인이 스스로 계기가 있어 진정한 결심과 고백이 있을 때 하시면 됩니다. 다만, 십일조를 하고 난 뒤, 나머지 9/10은 아무런 절제나 고려 없이, 자기 유익과 쾌락을 위해서 사용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렸기에 자신은 괜찮다는 것이지요. 돈에 있어서 성과 속을 나누는 것이랄까요? 게다가 내가 ‘성’이라는 영역을 지켰다는 데에서 발현되는 의로움이 오히려 나머지를 더 속물로 만들기도 해요.

그리고 남보다 죄 짓는 거에 도가 튼 분들은 이렇게 포장해요. “그래도 내가 십일조 했으니, 하나님이 나머지를 가지고 좀 맘대로 하고 허튼짓해도 퉁쳐주실 거야.” 반면에 그래도 죄 짓는 거 어색한 분들, 이런 분들은 타인과의 비교와 희생양 만들기를 통해 우월감을 스스로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나는 했는데 넌 안했네?’라며 우월감을 느끼고 때로는 정죄합니다. 본문에도 나오잖아요.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2절), “엿보고 있었다.”(7절) 표현의 의미를 더 정확히 살리면, ‘곁눈으로 훔쳐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타인을 감시하고 정죄하고 그 반대급부를 통해 만족감을 느끼는 것은 참 한심합니다. 새디스트도 아니고. 남을 비판해야 자기가 증명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이 진리를 따르고 있지 않다는 것의 반증입니다. 이런 분위기에 있으면 자신도 감시대상입니다. 그래서 선을 베풀고 치료하는 능동적인 삶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자기검열에 쩔어 움츠러드는 수동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자기보호를 위해 살다가 그렇게 소멸되는 삶이죠. 이것이 ‘종교’라는 굴레에서 비롯된 성속이원론의 함정이자, 우리에겐 ‘주일’일 수도 있는, ‘안식일’이라는 성스런 날만 바라보며 제한적 삶을 살아가는 자들의 한계입니다. 이처럼 그릇된 종교심은 나와 너의 분리를 통해 자유를 추구하는 모순점을 안깁니다. 하지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하지 이런 식으로 구속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나를 통해 너를, 너를 통해 나를 그리고 이런 우리가 주로 인해 함께 자유할 것을 요청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런 분이세요. 이런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이 복을 누리는 진정한 자유인으로서 샬롬을 누리는 예수님의 모습이 오롯이 드러나는 장면이 13-15절입니다. 12제자는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온 세상의 프로토 타입(Proto-Type, 기본 모델) 같은 것이기에, 주님의 복음이 온 세상 만방으로 뻗어나가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것임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건 나중 얘기고 현실로 돌아와, 이 복음의 역동성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이 열두 명. 다 한결같이 당시에 랍비의 제자가 되기엔 가당치도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그저 그런 어부, 죄인 중의 괴수 세리, 심지어 나중에 예수를 부인할 그 유명한 ‘가룟 유다’ 그리고 가장 이해 안 되는 건 세리 레위, 즉, 마태라는 사람과, 그런 로마에 결탁한 이를 무력으로 탈취하고 때로는 찔러 죽이는 ‘셀롯’ 즉, 열심당 출신 시몬이 함께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예수님께서는 쓸 만한 사람, 가치 있는 사람, 의인의 기준을 거부하였고, 전혀 다른 기준으로 온갖 구습과 시선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었을까요?

이렇게 사람을 살리고,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뜻, 예수님의 재해석과 선언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를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립니다. 사람들에게 의인이라 불렸던 ‘바리새인들’은 완강히 거부합니다. 자기 세계관이 공고하고, 그로 인해 인정받는 사람일수록 자기 세계관을 포기하지 못해요. 순종하기보다는 자기 세계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인간 심리 기저에 있는 종교성 아래 자기만족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대조적으로 재빨리 수용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10절에 보면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내밀어라!” 그러자 그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그 사람이 그렇게 하니”

네. 사람들이 그리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의인 축에는 들어가지 않는 바로 이 병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수용합니다. 물론 이 사람이 그저 가만히 멍청하게 회당에 앉아 있다가 얻어걸려서, 예수님을 만나 팔자 고친 사람으로 여기지 마세요. 이 사람이 단지 병자라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중풍병자, 세리, 혈루병 걸린 자, 손 오그라든 자가 그곳에 있었겠습니까? 다만, 그는 장애로 인한 사람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끝내 회당 밖이 아니라, 안에 자리하고 있었던 사실로부터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는 유대교적 신앙에 열심이 있었고, 그 신앙체계 안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에서 열심을 내보았던 사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열심을 다할수록 이게 아니구나 싶었던 것이지요. 치료도 안 되고 자유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손을 내밀라는 말씀 앞에 손을 내미는 행위로, 즉, ‘순종’합니다.

이처럼 안식일을 지킬 정도라면, 그 역시 이러한 치료행위가 안식일 지킴에 위배된다는 것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도 아랑곳 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네. 지금 그는 단지 손 내밀라는 말에 손을 내민 게 아닙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추종하던 세계관을 스스로 깨부수는 행위였던 것이지요. 자기 자신을 내민 겁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렇게 됩니다. “그렇게 하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 주님께서 명하시고, 순종하고, 회복되어 샬롬을 누리는 이 구도는 본문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로도 계속 반복됩니다. 그리고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강렬한 종교적이거나 신비적 체험이 아니라, 바로 이게 주님을 만난다는 것이고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의 시작입니다.

다시 유모차 사건을 떠올려보면. 굉장히 웃기죠? 그러나 지난주에도 언급했듯, 우리의 죄성으로 인해 본능적으로 사람을 의인과 죄인으로 나누는 시선. 이로부터 탈피해야한다는 설교를 들으면서도 실시간으로 또 ‘바리새인’이라는 자들을 죄인으로 낙인찍고 있을 모순된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지금도 또, 바리새인을 죄인, 즉, 속된 자들로 쉽게 폄하하고 계신 건 아니신가요? 바리새인들이 그 정도로 쓰레기나 꽉 막힌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율법해석에 있어서도 생명이 위독한 응급상황에서는 치료행위가 용인되었습니다.

다만 손 오그라든 사람의 병세는 계속해서 있었던 것이고, 생사를 다투는 것이 아님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에 문제제기를 한 것입니다. 나름대로 굉장히 하나님 중심으로 살려고 했던 이들이에요. 그래서 평가는 할 수 있어도, 비웃을만한 대상은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도 만약 예수로 인한 이 재해석, 아니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의도하셨던 그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극보수적인 행태, 즉 문자적인 성경지킴에만 몰입한다면 혹은 반대로 지나친 진보적인 행태로 자기만의 기준이나 합리화로 성경을 해석하는데 몰두한다면, 아무리 몽타주가 젊어도 옛사람이고,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 사실 자기 원칙과 세계관 안에서 열심을 다한 사람입니다. 그 ‘손 오그라든 자’ 역시 그 모양을 하고도 안식일 회당 안에 꿋꿋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 보면, 그 원칙과 세계관 안에서 열심으로 살아본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부끄럽게도, 그렇게 무언가를 숭고하게 여기고 지켜낼 만큼의 인내심조차 발휘해보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무언가를 목숨 걸고 지켜본 적도 없는 사람이, 무언가를 목숨 걸고 지키는 사람을 비판할 때는 좀더 예의 있게, 그리고 좀 더 맥락을 따져봤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비웃는 바리새인들의 안식일 수호의 전통. 그런데 정말로 로마제국 내내 유대인들이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고, 심지어 디아스포라 당하여서 유럽전역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훗날 다시 나라를 찾고 자신들의 민족정체성을 수립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정말 그 말이 맞습니다. 안식일이 그들을 지켰어요. 그런데 우리네 신앙에 있어서 우리가 고수하는 원칙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두가 성이길 원하셨어요. 그래서 성속이원론을 경계하지요. 하지만 ‘성’이라고 불릴만한 것이 있어야 경계하지, 처음부터 모두가 ‘속’이라면 뭘 경계합니까? 우리에겐 그 흔한 원칙마저 지켜내는 사람이 없어서, 어른이라고 불릴만한 존경할만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되게 슬픕니다. 예전엔 지켜내야 할 원칙과 원칙의 충돌이었다면, 지금은 무관심과 무관심의 충돌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십 수 년 전부터 회람되던 ‘삶의 예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배가 주일만이 아니라, 우리네 일상, 삶에서도 구현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재해석했던 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느덧 우리의 무기력함과 관심 없음이 이 멋진 표현 뒤에 숨어, 최소한의 열심조차도 내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다가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반론을 제기하시며 사용하신 유치원적 상식을 활용해보면 단순한 겁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몸이 있습니다. 반대로 몸이 거기 가 있지 않으면, 마음도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안식일 해석은, 바로 이 주님의 날이 나머지 6일로 확산되어 하나님 안에서 서로 자유할 것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의 날이 단 하루라도 지켜지기는커녕, 모두가 나의 날로 기념되는 완벽한 역변의 역사가 발현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일’은 어떤 날입니까? 모든 날이 주님의 날임을 기억할 수 있는 나에게 자유함을 주는 날입니까? 아니면, 성과 속으로 나뉘어져 받들어 모셔야할 특별한 한 날입니까? 또는 6일간의 내 삶에 단순히 하루 연장이 더 이루어져서, 국가가 지정해준 쉬는 날. 단지 그 다음 주의 노동을 위해 조금 여유를 가지는 날입니까? 저는 주일이 우리를 지키는 그런 현장이 우리 삶에서 구현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릇된 자기 세계관이나, 종교심에 짓눌리지 않고 예수로 인해, 그가 전한 복음으로 인해 안식하고 자유하시길 바랍니다.

손성찬 목사

총신대학교 신학과(B. A.) 및 신학대학원(M. Div.) 졸업
백석대학교 기독교전문대학원 조직신학(Th. M.) 수료
팟캐스트 공동 진행
육군 군종목사
예향교회 유초등부 전도사
람원교회 청년부 담당목사
(現) 이음숲교회 담임목사
■저서『묻다, 믿다,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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