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 금요예배 4주차 박성규 목사(부전교회)

유일한 구원, 하나님의 은혜

창세기 6장 5-9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올여름 온 나라가 비로 인해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안타까운 인명 피해도 있었습니다. 비는 이렇게 우리의 삶을 침식하고 어렵게 만듭니다. 큰비가 내리면 오늘 본문 말씀이 떠오릅니다.  바로 노아에 대한 말씀입니다.

노아 시대, 왜 하나님은 세상을 물로 심판하셨는가?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 6:5-7)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가득했다’는 말은 더 채울 수 없을 만큼 가득 찼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라브’라고 하는데, 이것은 많은 양, 최대의 양(Great), 가득 채워진(Full), 널리 퍼져 있는(Prevalent) 등을 뜻합니다. 노아 당시 인간들의 죄가 최대의 양으로 땅에 가득 채워졌으며,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이 항상 악한 것뿐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근심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 6:6)

‘한탄하다’는 말에 대해 영어성경은 다양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NASB성경은 ‘유감이다’(Sorry), NIV성경은 ‘후회하다’(Regret), KJV성경은 ‘후회하다’(Repent)라고 각각 해석합니다. 여기에 총신대 신학대학원의 김지찬 박사는 이것을 신인동형동성론(神人同形同性論)적인 표현으로 넘어가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댈러스신학교 교수인 로버트 치숌(Robert B. Chisholm)의 해석을 받아들여 ‘한탄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나함’(םחנ)을 ‘마음을 바꾸다’로 해석했습니다.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근심하시고 마음을 바꾸시기로 하셨다.”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김지찬 교수의 글을 제가 이해한 말로 쉽게 정리해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수준에서 작정(Decree)과 선언(Announcement)을 구분할 수 있다. 작정은 사람의 반응에 따라 바뀌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선언은 사람의 반응에 따라 바뀌는 것이다.”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작정이란 아브라함과의 언약, 다윗과의 언약이며 바꿀 수 있는 하나님의 선언은 모세의 기도를 통한 용서와 요나시대의 니느웨를 들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나함의 두 가지 용례인 ‘작정’과 ‘선언’의 용례를 보겠습니다.

1) 작정 차원에서 사용된 ‘나함’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 (삼상 15:29)

2) 선언 차원에서 사용된 ‘나함’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요 30:10)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창세기 6장 6절을 다시 번역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근심하시고 마음을 바꾸시기로 하셨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셔서 하신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창 6:7)

창조한 사람을 보존하시려는 것 대신에 심판하기로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인간들의 가득한 죄가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게 했습니다. 더 이상 찰 수 없을 정도로 가득 찬 죄가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왔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시고 심판하시기로 하신 것이 노아 홍수의 시작입니다. 그렇다면 그 죄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결혼 즉, 성의 문제와 폭력의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창 6:2)

‘하나님의 아들들’은 아담의 후손 중에 경건한 셋의 후손들을 가리키고. ‘사람의 딸들’은 아담의 후손 중에 경건하지 않은 가인의 후손들을 뜻합니다. 경건한 사람들의 아들들이 외모만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아름다움은 추구하면서 내면세계의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마음에 드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일부일처제가 무너졌습니다. 일부다처제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닙니다.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말 2:15)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성적으로 매우 문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시대에 노아는 한 아내에게서 세 아들을 두었다는 것만 봐도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봅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창 6:3)

여기서 ‘육신’이란 죄의 영향으로 타락한 육신, ‘죄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경에는 ‘사르크스’(σάρξ)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 단어 또한 육체와 함께 하는 ‘인간의 죄성’(Sinful nature)을 뜻합니다. 인간이 죄성을 가득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성적 타락은 반드시 폭력으로 발전합니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창 6:4)

네피림이란 70인경에 ‘기간테스’(γίγαντες)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거인을 뜻하는 ‘Giant’의 어원입니다. 이처럼 네피림은 ‘거인’을 뜻합니다. 민수기 13장 33절에서는 아낙 자손의 거대함을 보고 ‘네피림의 후손’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네피림은 ‘타락하다’를 뜻하는 ‘나팔’(לפנ)에서 생겨난 단어입니다. 네피림은 거인인 동시에 폭력을 행사하는 타락한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시대는 성적 타락과 폭력이 난무하는 죄가 가득한 세상이었습니다.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창 6:11-13)

그 심판의 방법이 홍수였습니다. 비는 사십 주야 동안 쏟아졌습니다. 비뿐만 아니라 큰 깊음의 샘인 지하수도 터져 나왔습니다.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창 6:17)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창 7:11-12)

하나님과 동행한 의인, 노아

그러나 하나님은 이 심판 가운데서도 인류를 구원할 한 사람을 예비하셨습니다. 바로 노아입니다. 노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창 6:9)

성적 타락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 더 이상 채울 수 없을 정도로 죄가 가득한 세상에서 노아는 이런 평가를 받았습니다.

1) 의인: 하나님의 법(말씀, 성경)을 따라 사는 사람

2) 완전한 자: 성실한 자, 온전한 자, 절대적 완전은 아니다.

3)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

노아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인물입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찾으시는지 보여줍니다. 오늘도 이런 사람을 찾으십니다. 이런 사람을 통해 가족을 구원하시고, 친구와 이웃을 구원하십니다.

노아의 방주, 단 하나뿐인 문

이 노아에게 하나님은 방주를 지으라고 하십니다. 방주란 무엇일까요?

1) 방주(方舟): 모 방, 배 주, 모가 난 배, 네모난 모양의 배

2) 방주(Ark): 상자, 궤 – 노아가 만든 배가 상자 모양이었기 때문

3) 방주(הבת): 상자(ark, box) – 노아가 만든 배가 상자 모양이었기 때문

이 단어는 모세를 담은 갈대상자에도 쓰였습니다. 방주는 이름 그대로 네모난 상자 배였습니다. 유선형이 아니었습니다. 엔진도 없고, 방향타도 없었습니다. 그저 홍수 때 가라앉지 않고 떠 있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상자 모양으로 지었습니다.

방주의 크기는 길이 137m(300규빗), 넓이 23m(50규빗), 높이 14m(30규빗)이며, 배수량은 2만 톤, 최대 선적량 14,000톤입니다. NIC 주석에서는 43,000톤이라고 하지만, 전문가들은 약 2만 톤이라고 봅니다. 소말리아 해적을 잡은 최신예 구축함 최영함이 4,800톤급이었습니다. 비교해보면 노아의 방주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습니다. 

1993년 창조과학회가 대전의 해사연구소에 의뢰해 노아 방주의 안전성을 조사해보니 대단히 안전하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것이 1993년 2월 17일 자 국민일보에 게재되었습니다. 복원 안정성, 파랑 안정성, 구조 안정성이 탁월하다고 평가했습니다. 심지어 30m 파도에도 거뜬히 견디는 배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커다란 배임에도 방주의 문은 단 하나였습니다.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창 6:16)

문이 복수가 아닌 단수입니다. ‘문들’이 아닌 ‘문’인 것입니다. 방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문도 단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요 10:7)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 10:9)

홍수로 심판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방법을 남겨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구원의 피난처 문은 단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을 미리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은 이 방주의 꼭대기에 있었습니다.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창 6:16)

위에서 한 규빗이니까 30규빗의 높이 중 1규빗 아래인 29규빗 지점에 창을 내게 하셨습니다. 방주의 맨 위에 창문이 있었던 것입니다. 왜일까요? 방주 안에 들어온 사람, 구원받은 사람은 위를 바라보고 위의 것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골 3:1-2)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골 3:5-10)

인간에게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이렇게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하신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창 6:3)

기회의 기간은 무려 120년이나 되었습니다. 120년에 대해 어떤 사람은 홍수 이후 인간의 수명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홍수 후에도 노아와 그의 후손 중 다수가 수백 년을 살았고, 그 후의 인물인 아브라함도 175년, 이삭은 180년, 야곱은 147년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120년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릴 심판을 유보하신 시간, 하나님께로 돌아올 시간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끝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 24:37-39)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벧전 3:20)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즉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구원의 방주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무서운 심판 가운데 멸망할 날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아직 방주에 들어오지 않은 분들이 이 자리에 있다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가 구원의 방주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심판의 날에 안전하며, 지옥이 아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결론

죄가 가득한 노아 시대에 홍수로 심판하셨던 하나님은 이 세상이 죄로 가득 찰 때 마지막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노아 시대 홍수 심판 때에 방주를 준비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준비하셨습니다. 구원의 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홍수 심판 전에 120년이라는 시간을 주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음으로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방주 안에 들어간 사람은 다 구원받았음을 기억합시다. 방주 안에 들어간 사람은 창을 통해 밖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창이 방주 맨 위에 있었던 것은 방주 안에 들어온 사람의 삶이 위를 바라보는 삶,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이 유일한 구원의 문이 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위를 바라보는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믿지 않는 우리 가족, 이웃, 친구들을 인도하는 계기가 되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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