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 금요예배 1주차

7 I am series

예수님의 자기소개(5) 양의 문

요한복음 10장 7-9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7 I am Series’를 계속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계십니까?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요 10:7)

그렇습니다.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을 다음 세 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왜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셨을까?”, “이 문을 통과하면 무엇을 얻는가?”, “이 문을 통과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들은 누구인가?”

1. 왜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셨을까?

예수님을 통해서만 양들이 우리(Fold)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0장 7절은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나는 양의 문이라”입니다. 이것은 헬라어로 ‘προβάτων’(프로바톤)이라고 합니다. ‘프로바톤’은 복수 소유격으로, ‘양들의’라는 뜻입니다. 이는 한 마리의 양이 아닌, 여러 마리의 양이 예수님께 속했음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의 ‘양의 문’은 ‘양들이 들어가는 문’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양들은 어디로 들어갈까요? 양의 우리로 들어갑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요 10:1)

요한복음 10장 1절에 “문을 통하여 우리로 들어간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일까요? 루터(Martin Luther)는 ‘교회’라고 하였고, 칼빈(John Calvin)은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라고 했습니다. 교회란 건물이 아닙니다. 이 건물은 교회당 또는 예배당이고,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 즉 이 공동체이며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공동체가 오늘 본문이 말하는 양의 우리입니다.

이 공동체는 아직 완전하지 않아서 양들끼리 서로에게 상처를 줄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양이요, 백성이라는 영광스러운 신분에 속해있으며,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성화되어 갑니다.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 문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행 4:11-12)

노아의 홍수 때 노아가 자기 가족 여덟 명을 구원했던 방주의 문도 오직 하나였습니다.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창 6:16) 

구약의 예배의 장소인 성막의 문도 오직 하나였습니다. 성막은 신약에 오실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 사역을 예표(豫表)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쪽을 향하여 뜰 동쪽의 너비도 쉰 규빗이 될지며 문 이쪽을 위하여 포장이 열다섯 규빗이며 그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요 문 저쪽을 위하여도 포장이 열다섯 규빗이며 그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며” (출 27:13-14)

성막에 들어가는 문은 동쪽 울타리에 오직 하나만 있었습니다. 울타리가 동서남북으로 쳐 있지만, 오직 성막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동쪽에 만들어진 문 하나였습니다. 성막 울타리의 높이는 2.5m로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성막 안의 영광과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성막 안에 들어가야만 했는데, 오직 하나뿐인 그 문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성막 사방에는 12지파가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한 방향에 세 지파씩입니다. 문을 동서남북에 하나씩 내면 얼마나 편리했을까요?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일까요? 성막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미리 보여주는 예표(豫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문은 오직 하나밖에 없음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문은 바로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문은 오직 한 분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성막 문에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매우 크고 넓다는 것입니다. 

“동쪽을 향하여 뜰 동쪽의 너비도 쉰 규빗이 될지며 문 이쪽을 위하여 포장이 열다섯 규빗이며 그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요 문 저쪽을 위하여도 포장이 열다섯 규빗이며 그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며” (출 27:13-14)

규빗은 남자의 팔꿈치에서 손끝까지의 길이를 말하는데, 평균적으로 약 45-50cm입니다. 한 규빗을 50cm로 계산하면, 동쪽 울타리가 총 50규빗으로 25m, 문의 좌우 울타리가 각각 15규빗으로 7.5m 그리고 문은 20규빗이니 10m입니다. 동쪽 울타리가 25m인데 문이 10m라는 것은 동쪽 울타리의 절반 가까이가 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문이 크다고 사람들이 다 들어오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 사람들을 구원의 문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복음 전파, 전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족과 이웃에게 복음을 힘써 전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롬 10:13-15)

그리고 이 문에는 문턱이 없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누구나 들어갈 수 있고, 누구나 들어가기 쉽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지금 바로 영접하면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죄인도, 강도도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기생 라합도 구원받아 메시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도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문턱을 없애는 것은 먼저 문 안에 들어간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래전, 미국에서 교회 들어가려다가 백인들에게 거절당하고 교회 앞에서 울고 있던 흑인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위로하셨습니다. “나도 그 교회에 들어가지 못했다.”

여러분, 우리 교회는 문턱이 낮은 교회입니까?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전도를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의 말이나 행동 때문에 문턱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이 있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문턱이 없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보기에 낮은 문턱도 처음 오는 사람에게는 높아 보입니다. 모든 문턱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불도저로 밀어버립시다.

미국에서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떤 성도가 새로운 동네로 이사하여 다닐 교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주일 아침에 운전하며 교회를 찾다가, 교통 안내를 하는 경찰에게 물었습니다. 

“이 주변에 좋은 교회가 있으면 소개하여 주십시오.”

“저는 교회에 안 다니지만, 저 교회가 좋은 교회라는 건 압니다.”

“교회에 안 다니시는데 어떻게 저 교회가 좋은 교회인지 아십니까?” 

“제가 여기서 19년째 교통정리를 하고 있는데, 저 교회 교인들은 예배를 마치면 모두 웃으면서 나와요.”

교회는 이런 곳이 되어야 합니다. 늘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좋은 말, 좋은 눈, 좋은 태도로 성도들을 대하고 사회 속에서 이웃들을 대합시다. 여러분의 헌신과 땀과 눈물의 헌신이 교회 위에 있습니다. 그 헌신과 땀, 눈물이 교회의 문턱을 낮추고 없앴습니다. 

예수님도 문턱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세리도, 죄인도 문 되신 예수님 앞에 나아와 구원받고 풍성한 삶을 누렸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2. 이 문을 통과하면 무엇을 얻는가?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 10:9)

이 문 되신 예수님을 통과하여 구주로 믿으면, 두 가지를 얻습니다. ‘구원’과 ‘꼴’입니다. 이것은 성도로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영혼의 양식’과 ‘물질적 양식’을 뜻합니다. 이 두 가지 중 우리는 무엇을 더 바라보아야 할까요?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영혼의 양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1)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 19:10)

이 영혼의 양식은 우리만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웃들에게 나누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신 예수님은 사람들을 믿는 자들의 전도를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영광스러운 전도의 동역자로 세우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1)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나서 많은 것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어려워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그런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국내 1호 성경 번역 선교사인 김의정 선교사님은 부산대 상대를 나오셨습니다. 지금도 좋은 학교지만, 예전에는 더 들어가기 힘든 학교였습니다. 졸업 후에 좋은 직장을 다니면서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지만, 인도네시아의 밀림에서 한 부족을 위해 30년이 넘게 헌신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언어를 만들어주고, 그 언어로 성경을 번역해주신 것입니다. 

우리 교회 협력선교사이신 김대순 선교사님도 UCLA 화학공학과를 나오시고, 사모님도 UCSD에서 화학공학과를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좋은 직장을 다니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태국 선교사로 20년 넘게 헌신해 오고 계십니다. 세상의 부와 명예를 다 십자가 밑에 묻은 채 살아가고 계십니다. 아들은 컬럼비아대학을 나오고 미국의 대기업에서 높은 직급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 아들이 고등학생 때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낸 후 다시 태국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아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빠는 나의 인생을 파괴하고 있어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선교사님의 마음이 얼마나 미어졌을까요? 

풍성한 꼴을 얻는다는 것은 대부분 물질적인 것을 포함하지만, 때로는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풍요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그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것은 영적인 양식을 얻고, 더불어 사명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 4:34)

양의 문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하나뿐인 양의 문이 되기 위하여 어떤 희생을 치르셨습니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히 10:2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마 27:50-51)

그분의 십자가 죽음 이후,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나뉘었습니다. 휘장은 두꺼운 벽처럼 생겼습니다. 그 휘장은 일 년에 한 번씩 대제사장이 대속죄일에 온 이스라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들어갈 때만 두 갈래로 갈려 문이 되었습니다. 일 년에 딱 한 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새 이스라엘의 성도인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하신 사건을 통해 구원의 문은 일 년에 한 번이 아니라, 영원히 열린 문이 되었습니다. 지성소를 가로막는 휘장은 더 이상 벽이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믿기만 하면 이 문을 통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 지성소의 은혜를 받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대제사장만 경험할 수 있었지만, 신약 시대인 오늘날에는 성령충만을 받으면 우리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성소의 은혜입니다.

3. 이 문을 통과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니, 그들은 누구인가?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요 10: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당시 유대인들을 지배하고 있던 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절도요, 강도’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당시에 사람들이 구원으로 가는 길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 23:13)

그런데 요한복음 10장 1절을 보면, 그들이 강도인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이것은 예수님을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 가는 문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지 않고 도리어 예수님을 핍박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절도요, 강도가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문 되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양의 우리인 교회, 신앙 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은 다 절도며 강도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유일한 구원의 문은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을 유일한 구원자라고 믿지 않으면서 우리에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양들인 성도들의 영혼을 도둑질하려는 신천지 같은 이단, 이만희 같은 교주 등은 다 절도며 강도입니다. 이런 이단들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이단들은 성도들의 물질을 빼앗고, 영혼을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목적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귀는 이단의 옷을 입고 아름다운 천사로 가장하여 성도들의 영혼을 도둑질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성도에 대해서 뒷조사하여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알아낸 후, 내가 당신에 대해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접근합니다. 이는 다 거짓말입니다. 성경은 마귀가 거짓의 아비라고 했는데, 신천지는 거짓말로 전도 대상자에게 다가가는 것을 모략이라고 부르며 합리화합니다. 거짓은 거짓이며, 거짓을 일삼는 것은 마귀의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우리에게도 거짓으로 다가오는 영의 도둑을 분별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결론

유일한 구원의 통로, 큰 문, 문턱이 없는 문은 예수님뿐입니다. 이 문을 통과하면 무엇을 얻습니까? 구원과 풍성한 삶입니다. 물질적인 풍요가 없어도 마음이 늘 평안하고 기쁩니다. 이러한 만족은 오직 예수님만이 주십니다.

이 문을 통과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그들은 누구입니까? 예수님만이 구원자이심을 인정하지 않았던 그 시대 종교지도자, 오늘날의 이단입니다.

우리 모두 유일한 구원의 문 되시며, 우리 삶에 풍성한 생명의 꼴을 주시는 예수님만을 신뢰하는 믿음의 삶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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