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 수요예배 4주차 김영한 목사(품는교회)

충격을 주는 사람!

요한복음 3장 1-8절, 4장 3-10절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중략) …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 대조와 비교를 통한 요한복음 3, 4장 개론 

오늘 읽은 성경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상당히 연관 없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3장과 4장에 나온 이야기를 대조하고 비교하여 우리에게 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3장에서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나아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고 마는 것과 대조적으로, 사마리아 여인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소망과 삶을 갖게 됩니다. 

 오늘 여기 3장에 니고데모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4장에는 사마리아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 두 인물은 서로 너무나 다릅니다. 크게 한 10가지 정도가 다릅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렇듯 다른 두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한 가지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두 인물을 비교하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 그리고 자신을 대조, 비교하면서 나는 오늘 어디에 서 있는 사람인지 고민하면 좋겠습니다.   

2.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 비교  

니고데모는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1) 니고데모는 예루살렘에 사는 바리새인 남자 

2) 당시 70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 오늘로 말하면 높은 국회의원 중 한 사람

3) 종교적으로는 율법을 잘 알고 가르치는 율법사 

그런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가 대화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의 대화의 시작에서 니고데모를 꾸짖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십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선생으로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한 사람으로 칭찬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거듭남과 하나님의 나라를 모르는 것을 꾸중하십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아무 변화와 도전 없이 사라집니다.

반면, 사마리아 여인은 어떻습니까?

1) 당시 소외된 지위가 낮은 여인 

2) 유대인들이 정말 싫어하는 사마리아 사람 중 한 여인 

3) 더 나아가, 사람들의 눈에 벌레 같은 간음하는 여인 

사회적, 종교적으로 아무 내세울 것이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대낮에 물을 긷기 위해 우물에 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마리아로 오셔서 이 여인을 만나십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건네십니다. 그런데 이 천박한 여인이 예수님과 예배를 어디서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신학적인 대화까지 나눕니다. 여인은 영생의 물을 간구하였고, 예수님은 그녀에게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니던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오히려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마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메시아를 만난 것을 전합니다.

3. 3장 니고데모 – 1장 세례 요한

니고데모는 당시의 바리새인이요, 율법사요,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1장에 기록된 세례요한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세례요한은 사막에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니고데모는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한 고백을 직접 들었을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이런 대단한 이야기를 듣고 바리새인이며 율법사인 그가 예수님을 만나러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무나 답답하셔서 “진실로”라는 표현을 3절과 5절에서 그리고 11절에서 세 번이나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세례요한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메시아를 증거하였는데도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거듭남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자신의 지위와 신분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엉뚱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신분과 지위와 지식이 있고 거기에 사람들이 메시아라고 믿는 예수님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더 쌓아 더 대단한 율법사로 있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우리에게 보여 주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자신의 물동이를 버리고 자신이 꺼리는 세상으로 주님을 위해 나아가는 여인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이 있습니까? 나란 사람, 내 가정, 내 교회, 내 왕국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나라와 내 교회, 내 가정, 내 자신, 내 자존심을 이롭게 하려고 하나님의 나라는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기도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가 아니라 “주님! 내 뜻과 내 계획과 내 소원이 이루어지게 해주소서!”라고 간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도 영적으로 눈이 멀어서 내가 원하는 무엇을 얻으려고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내 건강, 내 소유, 내 뜻이 하나님 나라를 앞서고 있지 않습니까? 

니고데모처럼 세례요한의 말씀을 듣고 메시아가 와서 직접 하나님의 나라와 거듭날 것을 명하고 말씀하고 계신데도 우리는 여전히 니고데모처럼 완고한 바리새인이요, 산헤드린 공회원이요, 율법사로 하나님 앞에 서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마음과 눈물을 읽지 못하고 내 왕국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이는 모임과 예배가 정말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공동체로 서 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왕국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의 나라와 예배에는 관심이 없고 ‘교제’와 ‘친교’에 주력하며 자신의 성을 쌓으려고 하지 않을지 걱정입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는 어떻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듭난 성도로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이 있습니까? 아니면 가문을 위해 교회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배를 위해 모이고 흩어져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곳에 모이고 흩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없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거듭남입니다. 우리가 드러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이익이 앞서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있고 하나님 나라도 있는 것, 그것은 참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니고데모가 거듭남을 모르고 하나님의 나라를 알지 못하고 예수님께 책망받은 행동입니다.  

여기 니고데모는 철저히 세례요한과 대조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보았을 때 “그는 성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해야 하리니”라고 고백했는데 니고데모는 자신이 율법사이고 바리새인이기 때문에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에 예수님을 만나 더 많은 신비하고 좋은 것을 듣고 자신의 지위를 더 굳게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지식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 나라를 무너뜨릴 때 세워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 이익을 내려놓을 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 계산을 내려놓을 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 경험을 내려놓을 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 땀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눈물이 흐를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 수고가 아니라 주님이 주신 헌신으로 희생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내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은 함께 세워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 나라가 무너질 때 세워지는 나라입니다. 

4. 성전 척결 사건 – 성전이 무너져야 하는 이유?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의 나라를 세우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요한복음 2장에 예수님이 성전에 올라가셔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으십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장사하고 돈 바꾸는 사람들을 증오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언제 가증히 여기십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유지하기 위해 성전을 중심으로 이익을 내고 취할 때 가증하게 여기십니다. 

철학자들은 교회를, 종교화된 기독교를 비판했습니다. 종교적인 타락이 있을 때 예배 이외의 것에 관심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가, 이 나라가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에 집중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나라 백성을 지키실 것입니다. 회복과 부흥도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출 때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우리의 마음을 쏟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서 있을 때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지 못함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거룩한 성전, 예루살렘 성전도 무너졌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중심이 된 것이 아니라 성전 자체에 모든 마음과 신앙을 쏟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상화된 성전을 하나님의 백성이 거한 성전을 주님이 무너뜨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고 그 하늘의 소망을 두고 나아간다면 하나님의 기적을, 당연한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 내가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성전이 되었을 때 무너졌습니다. 나를 위한, 누구를 위한 것이 되기 전에 먼저 무너트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온전히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관심은 그러한 겸손한 하나님의 사람에게 있으십니다.

5. 하나님의 나라와 사마리아 여인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사마리아 여인의 삶을 통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낮에 물을 뜨러 온 사마리아 사람들조차 쳐다보지도 않는 여인입니다. 사마리아 자신들도 유대인들에게 개 같은 존재라고 차별을 받았습니다. 거룩하지 못한 민족이라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런 사람 중 사마리아 여인은 더 가증히 여김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정말 가증하게 여기는 간음하는 여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찾아가십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에게 영원한 생수를 구하게 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 물어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사마리아 여인은 사람들에게 달려가서 메시아를 선포합니다.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지도 사람들에게 무엇을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이 복음을 위해 나아갔습니다. 그들을 찾아갔습니다! 아무 직분도 없고 인정해주는 이도 없는데,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물통을 버려두고 그저 주님이 주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세상으로 자신의 어두운 죄악의 자리에서 소명의 자리로 나아간 것입니다. 

자신이 지키려고 했던 어둠의 세상, 정욕의 세상을 위해 뜨거운 낮에 물을 길면서 사람의 낯을 피하면서 자신의 음욕과 정욕의 세상을 유지했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이제는 자신의 세상, 자신의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자신을 조롱하고 멀리했던 이웃, 아니 원수들을 위해 나아갑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신분과 이익과 명예를 위해 예수님을 만나고도 자신의 왕국을 위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못했는데 사마리아 여인은 오늘 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줍니다. 자신의 소욕과 정욕을 버리면서 말입니다. 자신을 증오하는 사람들의 굴욕을 상관하지 않고 주님을 전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의 물동이를 버린 사람입니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나라를 위해 물을 긷지 않습니다.

6. 충격을 주는 사람들 

충격을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변화된 삶을 통해 충격을 줍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주셨을 때 ‘변화 된 삶이 저런 삶이구나’ 하고 눈으로 보게 해 주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충격을 주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니고데모처럼 표적과 기적을 좇는 사람으로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주시기를 바라고 주님이 어떤 유익을 주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고 주님께 나아오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저 세상의 문제로 목이 타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구하러 갔다가 예수님을 만나 영원한 생수를 얻었습니다.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에게 우리의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이 하나님에게 많은 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말이 많아서 여러분의 요구만을 주장하면서 오히려 예수님과 대화가 안 되는 니고데모로 서 있지는 않습니까? 성경을 잘 알고, 신앙의 윤리도 잘 아는데 니고데모처럼 메시아 없는 삶을, 거듭나지 않은 삶을 살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보다 내 나라를 세우는 것이 우선순위가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7. 요한복음은 세상을 정죄 

다른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핍박과 정죄를 받는 것을 기술합니다. 그러나 여기 요한복음은 ‘증거하다’, ‘증거’, ‘심판하다’, ‘심판’이라는 법정 용어를 사용하면서 세상을, 세상의 어두움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당당히 빛의 자녀로 빛으로 오신 예수님에게로 나아 올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주님께 당당히 나아가야 합니다. 어두움을 정리하고, 나의 왕국을 정리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주님은 니고데모를 찾고 있지 않습니다. 종교 지도자, 윤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오늘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 같은 한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아는 사람을 찾고 있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들고, 나갈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나라를 지키고 더 가지려고 하는 사람을 찾고 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보내기 원하십니다. 주님의 마음을 알고 아버지의 뜻이 내 뜻이 된, 주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알아 주님의 눈물을 흘리는 사마리아 여인을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세상을 향한 소망과 열정을 가진 니고데모가 아니라 자신의 나라는 없어지더라도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을 사모하여 그 나라를 향해 굴욕을 감수하며 복음을 증거하는 사마리아 여인을 찾고 계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은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우리에게 약속된 축복을 말씀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렇다면 여기에 나타난 이 모든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에게 있어야 모든 것을 주님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축복을 받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구합니다. 

김영한 목사 

총신대학교 대학원(M. Div.) 
캐나다 TWU(Trinity Western University) 성서학 석사
남아공 Pretoria University 신학박사 수학
(前) 대구동신교회 청년 아포슬 디렉터 
(前) 주님의교회 청년부 디렉터
(現) Next 세대 Ministry 대표
(現) 품는교회 담임

■ 저서 
『청년아! 깨어나라!!!』, 『중독 A to Z』, 『미쳐야 미친다』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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