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 수요예배 3주차 김영한 목사(품는교회)

‘회상’ 혹 ‘화상’

요한복음 3장 1-10절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회상’이라는 말은 ‘어떤 사람과 일에 대한 좋은 추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상’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을 마땅치 아니하게 여기어 낮잡아 이르는 말’입니다. “아이고, 이 화상아!”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예수님에게 어떤 존재였을까요? 예수님이 기쁘게 여기던 회상의 대상 혹은 마땅치 않은 화상과 같은 존재였을까요? 

1. 개구쟁이와의 비밀대화

제가 초등부 사역자였을 때, 어느 날 설교가 끝나고 초등학교 4학년인 개구쟁이 친구가 잠깐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저를 조용한 곳으로 이끌었습니다. 이 친구가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면서 “저도 구원을 받을 수 있나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럼 당연하지!”라고 대답을 했어요. 그 친구가 밝아지더니 이 이야기는 다른 친구들에게 하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이 친구는 나중에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니고데모도 예수님과 조용히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사람들 눈을 피해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2절에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 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2. 꾸중 듣는 니고데모

그런데 이 니고데모는 제가 만난 개구쟁이 친구처럼 좋은 믿음의 소유자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고백을 하는 니고데모를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니고데모가 “당신은 선생이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분입니다”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그 말의 대답과 다르게 거듭남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니고데모의 고백이 있은 뒤 바로 3절에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중요한 말씀을 하시거나 사람들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줄 때 쓰시던 표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이 베푸신 이적과 표적은 믿었지만 예수님을 찾아왔을 당시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고 거듭나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니고데모가 한밤중에 몰래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사실 그의 관심은 거듭남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혹은 영생에 대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가야 하고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것은 알지만 거듭남이나 영생에 대해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주님의 근심이 됩니다. 주님이 하신 일을 보고 놀라는 것도,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거듭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냥 니고데모처럼 예수님을 좋은 선생님, 하나님과 함께하신 분 정도로 고백하는 믿음이 부족한 신자일 수 있습니다.

3. 니고데모는 누구

1) 바리새인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1절에 ‘바리새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관원’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2) 산헤드린 멤버

니고데모는 당시 종교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의 관원이라는 것은 로마 통치하에 의장 1명과 70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의 회원이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국회의원입니다. 

3) 율법에 정통한 교사

그리고 10절에서 예수님은 그를 율법에 정통하고,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영생이 무엇인지 잘 몰랐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지위와 신분, 신앙의 지식에 만족하였고 더 나아가 예수님이 보여주신 새로운 표적과 기사를 더 배워서 신앙적 지식을 더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의 관심은 하늘의 것, 영적인 것이 아니라 육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4. 예수님의 관심과 니고데모의 대조적 삶

예수님은 6절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니고데모가 율법사요 신앙이 뛰어난 바리새인이었지만 육에서 나고 육의 것을 먹고 육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축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으로 나서 영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7절에 예수님은 “내가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육의 것에 너무나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내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을 택해야지 육에 도움이 되는 것을 택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니고데모를 책망하신 이유입니다.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왜요? 그는 육에 속한 사람으로 어두움에 속했던 사람입니다. 니고데모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신분과 지위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밤에 온 것입니다. 

왜 니고데모는 거듭나지 못했고 거듭나기가 힘든 것입니까? 그것은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왜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을까요?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 율법사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사람들을 가만두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았던 니고데모는 그 사람들의 눈을 두려워하여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메시아를 보고 자신의 부모님과 자신의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표적이 놀랍고 기이해서 위대한 표적을 행하는 예수님을 한번 만나보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우리도 니고데모처럼 교회에 오지는 않습니까? 영생에 대한 관심과 거듭남에 대한 영적인 진리를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에 관심을 가져 교회로 오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이 행하시는 그 표적과 기사가 우리 가운데 나타나 내가 세상에서 쌓아 올린 것을 더 높게 쌓고 더 좋은 삶을 위해 교회로, 예수님께로 오는 것은 아닙니까? 

5. 거듭나지 못하는 이유

문제는 예수님이 6절에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육신의 즐거움과 죄의 본성을 좇아 눈에 보이는 대로 따라 산다면 육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난 것과 영의 세계에 관심이 없습니다. 

왜 거듭나지 못한 것일까요? 왜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고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내게 영적 더듬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께 관심이 없고 세상에 관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향한 더듬이는 민감하게 가지고 있으면서 영적인 더듬이는 잘라내고 있진 않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하늘의 것을 보여 주시려고 해도, 알려 주시려고 해도, 세상만 쳐다보고 있는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보여 주시겠습니까? 우리는 속히 영적 더듬이를 회복해야 합니다.

세상의 일만 하고, 세상 걱정만 하다가 가끔 “주님, 주님을 알고 싶어요” 하면 안 됩니다. 니고데모가 세상 사람들의 눈이 두려워하며, 자신이 가진 직분을 중요하게 여기고 잃지 않으려고 하면서 주님께 나왔을 때 그는 칭찬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거듭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듭나려면 우리는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옮겨야 합니다. 세상의 영역을 즐기고 그 영역에서 무엇인가 누리려고 하기 때문에, 영적인 영역으로 가려고 해도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습니다. 습관, 취미 그리고 삶이 그 한 영역에 이미 깊이 빠져 있기 때문에 다른 한 영역으로 가려고 해도 완전히 옮겨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11절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말하고 증거하고 있습니까?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니코틴의 냄새를 풍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에 빠져 있는 우리는 죄의 형태와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걸음걸이와 표정에서도 자신의 죄성과 이기적인 모습을 발산하고 다닙니다. 우리가 지금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는지 돌아보며 점검해야 합니다.   

6. 거듭남과 영생의 비결? 

1) 쳐다보기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 우리에게 거듭나라고 도전하십니다. 어떻게 거듭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율법사인 니고데모가 거듭남의 의미와 어떻게 거듭나야 하는 것을 모르는 것에 대해 책망하시면서 우리에게 진정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4)

거듭나는 방법은 쉽습니다. 그러나 실천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은 너무나 많은 것을 바라보고, 계속 세상의 것에 욕심을 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한 분만 바라보지 못 하는 허영과 죄악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지 않습니까? 

2) 듣기 

우리가 영적인 소리와 하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불필요한 소리를 너무 많이 들으며 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어떻게 하면 성공하는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지 어떻게 살면 더 나은 삶을 사는지 등 너무나 많은 잡소리에 우리의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서 오는 소리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혹 하늘에서 오는 소리가 있더라도 다른 주파수와 섞여 알아들을 수 없게 됩니다. 

 믿음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수많은 소리와 수많은 볼 것 그리고 귀중히 여기는 것들을 제치고 주님을 우리 눈 안에 넣은 것입니다. 주님을 그저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때 거듭남이 시작됩니다.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하고, 내가 어떤 계획을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주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주님의 눈 안에 있는 하늘나라를 소망하고 주님의 소명과 뜻이 바로 내 뜻이 되는 것이 거듭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3) 구름에 달 가듯이 사는 나그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는 정처 없이 방향을 주장하지 않고 걸어가는 삶이 바로 나그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이어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고 원하시는 대로 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8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바람이 불고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듯 성령으로 난 사람이 되면 바로 바람과 같은 인생을 살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삶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삶을 삽니다. 세상의 눈에 좋아보이는 삶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비전을 따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삶을 계획하고 살아가십니까? 참 잘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바람과 같은 성령의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봐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다 알 수 있는 삶이 아니라 거듭나서 오직 주님이 말씀하시는 곳으로 와서 주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가는 바람의 사람이 되는 것이 거듭난 삶입니다. 바람과 같은 사람이 되려면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너무나 많은 것에 묶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 선교사님은 1891년 12월 한국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이듬해 6월 21일에 아내 로제타(Rosetta Sherwood Hall)와 결혼을 했습니다. 1893년에는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이 태어났습니다. 의사였던 홀 선교사님은 평양선교를 위한 개척 책임자로 임명되어 1894년 맥켄지(William John Mckenzie) 목사와 함께 평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현재 서울 광성고등학교의 모체인 광성학당을 시작하면서 교육사역과 병원사역을 통해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해 7월에 일어난 청일전쟁으로 평양은 전쟁터가 되었고, 닥터 홀 선교사님은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을 치료하다가 전염병에 감염되었습니다.

일본군 패잔병과 함께 서울에 도착한 선교사님은 아내 로제타와 아들 셔우드 홀의 손을 붙잡고 마지막 기도와 유언을 한 후 끝내 숨을 거두었습니다. 한국에 온 지 2년 만에 그는 한국 땅에 묻혔습니다. 당시 임신 말기였던 아내 는 아기를 낳기 위해 어린 아들 셔우드를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곧 귀여운 딸 에디스가 태어났고 얼마 후, 윌리엄 홀 선교사의 모교회에 방문 했습니다. 제임스 홀의 모습을 닮은 셔우드 홀과 딸 에디스를 본 모든 교우들은 눈물로 그들을 반겼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로제타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네 남편 윌리암 제임스 홀이 이루지 못한 조선 사랑을 네가 이루어라.” 

로제타는 아들과 딸을 대리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조선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랑하는 딸이 한국의 풍토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그 딸을 남편 묘 옆에 묻으면서 그녀는 다시 한번 결심했습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내 아들 셔우드와 한국에서 오랫동안 사역을 할 수 있 도록 도와주십시오.”

로제타 선교사님은 남편과 딸을 잃었지만 어린 셔우드를 키우면서 조선 사 랑을 실천해 나갔습니다. 그는 평양의 홀 기념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여자 환자를 위한 광혜여원을 개원하였고, 어린이를 위한 병원도 개원했습니다. 또한 맹인소녀들에게 점자를 교육하기 위해 한국 최초의 맹인학교를 세웠고, 농아교육도 시작하였습니다. 과거 서울 동대문 이화여대부속병원은 로제타 선교사님이 세운 병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설 립했는데 그 병원이 지금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이 되었습니다. 또한 인천의 간호 대학과 기독 병원은 모두 로제타 선교사님이 세우신 병원입니다. 로제타 선교사님을 통해 하나님은 큰일을 이루셨습니다. 로제타 선교사는 미국이 뽑은 200대 여인의 한사람이 되었으며, 8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면서 남편과 딸이 묻혀있는 양화진에 함께 안장되었습니다. 

아들 셔우드 홀도 부모님의 조선 사랑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16살이 되던 해, 어렸을 때부터 함께 지내면서 누구보다도 정들었던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가 결핵으로 숨지자 큰 충격을 받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 였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가 의사가 된 셔우드 홀은 결혼하여 부인 메리안과 다 시 한국에 들어옵니다. 그는 한국 최초로 결핵협회를 창설하였고, 한국 최초의 크리 스마스 씰을 만들어 판매하였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조선 사랑을 이어가던 셔우드 홀에게 어려움이 닥칩니다.

일본과 미국의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셔우드 홀을 헌병대에 연행하고, 재판에서 징역 3년, 5000엔 벌금형을 내립니다. 그는 가재도구와 집을 팔면서 끝까지 한국에 남아있기를 원했으나 결국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셔우드 홀 부부는 선교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쫓겨난 셔우드 홀 부부는 인도로 건너가 마지막 힘을 다해 선교에 힘을 쏟았습니다.

은퇴하여 캐나다에서 쉬고 있던 어느 날, 그는 한국에서 온 편지를 받았습 니다. 결핵협회와 아버지가 세운 광성고등학교에서 보내온 초청장이었습니다. 91세의 나이로 사랑하는 한국 땅을 밟은 셔우드 홀 부부의 감회는 남달 랐습니다. 그는 양화진에 묻혀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의 묘를 방문하고 광성고등학교 예배 시간에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유언을 남깁니다.

“I still love Korea, 저는 여전히 한국을 사랑합니다. 제가 죽거든 나를 절 대로 미국이나 캐나다에 묻지 마시고 내가 태어나서 자랐던 이곳, 또한 내 사 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누이가 잠들어 있는 한국 땅에 묻어 주시기를 바랍 니다.”

그는 9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고, 부인과 함께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 홀과 어머니 로제타, 동생 에디스와 함께 양화진 땅에 묻혀 있습니다.

우리는 죽으면 사람들에게 어떤 회상을 남길 수 있을까요? 혹 좋은 회상은 아니더라도 ‘화상’ 같은 인간이었다는 말은 듣지 않도록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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