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 수요예배 1주차 김영한 목사(품는교회)

세상 속 진.정.성. 있는 자 

요한복음 1장 5-8절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제가 아내를 만나 연애하던 시절 아내에게 종종 편지를 써서 주었습니다. 연애할 때는 편지를 대충 쓰지 않습니다. 한 단어, 한 문장, 한 단락 특별한 마음을 담아 씁니다. 요한복음도 그렇습니다. 요한이 대충 적은 복음서가 아닙니다. 

1. 특별한 형식 

1) 시의 형식

사랑하는 사랑에게 편지할 때 압축해서 말을 전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중 하나가 아름다운 시로 마음을 압축하여 담아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요한은 1절에서 18절까지 산문이 아닌 시로 글을 적어가고 있습니다. 1장 1-18절은 요한복음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감당합니다. 이 첫 부분은 단순한 서론 부분이 아닙니다. 이 서언은 정말 잘 짜인 시적 언어 형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2) 두 가지 이야기

요한은 무엇을 이야기하려 합니까? 두 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과 그의 사역, 그리고 둘째는 세상의 반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요한은 서언에서 앞으로 요한복음 전체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풀어 갈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즉, 이 요한복음 서언은 어떻게 예수님을 믿고 반응해야 하는지 가이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까? 이 서언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이야기해줍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이해할 것과 세상이 어떤 존재이고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여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드러내는 세상의 빛으로 곧, 가이드북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두운 세상의 무서운 공격

세상은 어둡다고 요한은 말합니다. 코로나가 터졌을 때,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일예배를 드려야 한다’와 ‘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서로 다른 의견이 팽팽합니다. 

먼저, 주일예배를 드리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 의견은 사회에 코로나 공포를 확산하지 않도록 교회가 자중하자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모이면 위험 요소가 있기 때문에 대면 예배를 드리지 않고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몇 명이 모이지 않는 교회는 “그럼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가 문제입니다. 실제로 가정에서 소규모로 모여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소규모로 예배를 드리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소규모로 예배를 드리는 것 또한 예배라는 이유로 혐오하는 세상 사람들이 있습니다. 커피숍에 가 보십시오. 서울에 맛집을 가 보세요. 사람들이 넘쳐 납니다. 그런데 사회는 작은 교회가 예배를 드리는 것에 혈안이 되어 질타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배려 차원에서, 예배를 자중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세상적인 핍박을 두려워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저는 코로나19의 시기에 개인적인 만남과 미팅을 거의 다 취소했습니다. 만나자고 하는 사람들에게 코로나가 지난 뒤 만나자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쉬지 않으려고 합니다. 세상이 질타한다는 이유로 예배를 중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 로마는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예배드리고, 하나님 섬기는 것을 중단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드러내놓고 예배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배를 중단하지는 않았습니다. 소규모로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모일 수 있는 곳에서 모였습니다. 

여전히 국가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무서운 시선으로 교회를 째려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예배를 취소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라에서 긴급 상황으로 예배를 온라인으로 드려달라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악법도 법이니 우선은 지켜야 합니다.

2. 특별한 로고스 형식으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요한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요 1:7)

요한은 자신의 정체성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증언하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을까요? 요한처럼 자신을 철저히 내어 드리고, 전하고 다시 전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고, 사람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누군가에 의해 복음을 들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정확히 알고 전했습니다.

요한은 서언에서 예수님이 단순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태초에 계신 로고스로 오신 빛이라고 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 곧 구속자라는 것입니다. 시작과 끝의 주인공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혹 예수님을 그냥 예수님으로 알고 있지만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유일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 여호와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이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창조를 하셨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본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빛으로 오셔서 세상에 구원의 빛을 비추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 주님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것처럼 우리도 로고스로 오신, 구원자로 오신 주님과 함께 있으면 세상 심판 날에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 날에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빛의 예수님과 어두움의 세상

빛이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동행하기 때문에 우리가 단순히 영원히 사는 것뿐만 아니라, 어두움이 우리를 감당할 수 없고 우리를 더 이상 다스리고 주관할 수 없습니다. 왜 죄와 세상에서 허우적거리며 힘들게 살아가는 것입니까? 

여러분,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우리는 참 연약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연약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창조와 질서의 주님이 없기 때문에 혼돈하고 공허한 것입니다. 어디에서 왔는지, 또 어디로 가야할 지를 몰라 힘들 때가 있습니다. 또 지금 현재의 일로 인해 힘들 수 있습니다. 그 모든 문제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빛이신 주님이 내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없기 때문에 내 안이 어둡고 그 어두움이 발산되는 것입니다.  왜요? 빛의 주님이, 창조의 주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에 주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요? 

몇 년 전 명절에 처가에서 자는데 꿈에서 나온 세 단어가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잊지 않으려고 슬로건을 만들었었습니다. 바로, ‘진.정.성 있는 파워풀한 크리스천’입니다. 진실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크리스천이 이 시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진실하지 않습니다. 정직하지 않습니다. 성실한 자를 보기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사탄은 진.정.성 있는 크리스천이 나타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편법을 행하고, 부정직하고, 게으른 자가 많아지기를 원합니다. 마냥 착하기만 하고 성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실하게 일만 하고, 진실하지 않거나 정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세 가지가 같이 가야 합니다. 

3. 요한 신학의 특별한 형식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요 1:7)

요한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신학은 모두 이 기독론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구원론과 내세론 곧 죽은 뒤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의 신학의 기초요 반석이요 틀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틀과 반석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입니까? 

요한복음의 특징은 바로 시로 적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적 형태로 적힌 서언은 언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되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언어가 반복되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분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도 예수님에 대해 듣고 단순히 말하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한 부분, 한 부분이 주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증거 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펌프질 할 때 마중물

분수의 물이 나오려면 한 번 물이 솟아서는 안 됩니다. 끊임없이 물을 퍼 올려 주는 펌프가 있어야 물이 나옵니다. 우리 안에 증인의 삶과 행복한 삶의 근원인 예수님이 우리 삶의 원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을 드러내셨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을 전하였고,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함으로 하나님의 기적과 표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을 행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육신이 되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선제 되어야 할 것

그렇기에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사는 데 있어 가장 선제 되어야 할 것은 바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머무는 시간이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일을 하고, 여러 사람을 만나는 것은 아주 미련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그리고 삶을 살아간다는 말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의 형상을 입게 되고 주님이 원하시는 삶의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사람과의 교제도 좋지만, 주님과도 교제를 해야 합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에 입문할 때 3단계는 무엇일까요? 함께하기와 동감하기, 그리고 깨어있기입니다. 먼저 주님과 함께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생각과 마음을 받아 동감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깨우쳐 주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깨어 있기까지 합니다. 

판단과 동행하시는 주님으로 인한 통회!

한쪽 귀로만 들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가요? 왜? 하나님이 안 계시고, 나를 위해 일하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나요? 그것은 내 안에 하나님이 없고, 내 안에 내 뜻만이, 내 계획만이, 내 욕심만이 가득해서입니다. 내 뜻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내 안에 주님의 뜻이 들어오지 않고, 해석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이 읽히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으니 내가 판단하고, 내가 모든 것을 결정해도 틀려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하나님이 내 삶을 비추어 주시도록 하지 않으니 판단하고 살아가는 삶이 틀려 보이지도, 잘못되어 보이지도 않는 것입니다. 

주님이 없이 세상의 어떤 것을 원하기만 하면 무엇을 아무리 가져도 불안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하나님을 품고 사는 사람은 사람의 생각으로 품을 수 없는 것을 품고 사람의 계산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을 품고 살아갑니다. 바로 비전을 먹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삶에서 웃을 수 있고 그래서 바로 또 하나님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미래엔 나아지겠지’라는 편협하고, 안일한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지금 말씀하시고, 동행하시는 주님으로 인해 우리는 감사하고, 인내하고, 주님의 음성에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복음을 아는 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아는 것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요 1:8)

사도 요한은 세례요한이 빛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실, 세례 요한도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였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을 증거하고 계시듯, 우리가 주님과 동행할 때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오직 주님을 계시하고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만나면 힘이 빠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만날 때마다 힘을 주고, 웃을 수 있게 합니다.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한 사람에게는 얼굴과 삶에 어둠이 가득하지만, 또 다른 사람은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빛을 비춰주시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도 그 빛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임하면 여러분이 있는 곳이 밝아집니다. 

어두움 속에 있으면서, 죄의 늪에 있으면서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한다면 그 모임과 그 일에 여러분은 짙은 어두움을 드리우는 어둠의 사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두움에서 벗어나 오늘 요한이 서언에서 강력하게 말하는 창조주이시며 이 세상의 빛으로 오신 주님을 영접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에 주님을 계시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증거하고 드러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증인의 삶이며, 그것이 바로 또 다른 요한복음의 서언과 같은 믿음의 가이드북을 쓰는 현대의 요한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는 방법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역할은 철저히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철저히 주님의 일과 주님을 드러내는 곳에 우리의 삶을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행복합니다. 그것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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